고려~조선 사찰 흔적 드러난 포항 안국사지, 긴급발굴로 실체 구체화

곽성일 기자 2026. 1. 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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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건물지 유구 32기 확인…가구식 대형 석제 수조 등 학술 성과
신라 창건설·의병 전장 겹친 역사 공간, 보존·활용 병행 추진
▲ 안국사지 출토 석제 수조 모습.

포항시 북구 기계면 남계리에 위치한 향토문화유산 안국사지에서 실시된 긴급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사찰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그동안 자연 훼손과 도굴 우려로 학술적 접근이 제한돼 왔던 안국사지의 실체가 이번 조사로 한층 구체화됐다는 평가다.

이번 조사는 국가유산청의 '2025년 매장유산 긴급발굴조사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복권기금을 재원으로 추진됐다. 안국사지는 수해와 사태 위험이 큰 지역에 자리해 체계적인 조사와 보존 대책이 시급한 유적으로 꼽혀 왔다.

△조선후기 사찰의 윤곽…건물지 유구 32기 확인

조사 결과 사역 전반에서 건물지와 관련된 유구 32기가 확인됐다. 석축·석조·기단 등 주요 유구는 조선시대 후기 유물과 같은 층위에서 출토돼 안국사지가 마지막으로 기능했던 시점은 조선후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안국사의 존속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성과다.

다만 지표 조사 과정에서 고려 말~조선 초기로 보이는 유물이 확인됐고 석축 하부에서도 돌로 쌓은 구조물과 불에 탄 흙층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조선 이전 시기의 문화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안국사지의 연원이 더 오래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 지난해 11월 안국사지 시굴조사 학술자문회의 현장.

△가장 큰 성과, '가구식' 대형 석제 수조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사찰 내에서 확인된 석제 수조 1기다. 이 수조는 폭 약 3.5m, 너비 2.6m, 높이 1.3m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형 구조물로 식수 공급이나 취사 등 사찰의 일상 운영에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국내 사찰 유적에서 흔히 보이는 일체형 석조 수조와 달리 안국사지 수조는 대형 판석을 결구해 만든 '가구식 구조'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결구 흔적이 뚜렷하고 하단부에는 반원형 유수구까지 확인돼 당시 석조 기술과 사찰 공간 운영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신라 창건설부터 의병 전장까지…중층적 역사 공간

문헌에 따르면 안국사지는 신라 소지마립간 재위 시기인 479년에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 '신라운주산안국사사적'(영조 33년·1757)을 비롯해 '동경잡기', '범우고', 조선 중·후기 고지도인 '광여도', '경주도회', '비변사인방안지도' 등에도 지속적으로 표기돼 역사적 위상이 뚜렷하다.

근대사에서도 안국사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남의진 1대 대장 정용기가 이끈 항일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됐으나 일본군의 방화로 사찰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사찰 유적이자 구한말 항일 투쟁의 현장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셈이다.

△보존 넘어 '역사문화공간'으로

안국사지는 2024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기념물)으로 지정됐다. 시는 이번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학술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존과 활용을 병행하는 중장기 계획을 마련할 방침이다.

포항시 관계자는 "이번 조사로 안국사지의 역사성과 보존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삼국시대 사찰의 전통과 구한말 산남의진 의병 전장의 의미를 함께 담아,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긴급발굴은 안국사지를 '묻힌 유적'에서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전환하는 출발점이다.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추가 조사와 정밀 연구를 통해 시간의 층위를 복원하고, 그 성과를 시민과 공유하는 일이다. 안국사지가 포항의 역사 지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