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안이 원래 이 정도였나...'경도를 기다리며'가 끄집어낸 연기 잠재력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6. 1. 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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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를 기다리며’, 어째서 원지안의 재발견이라 말할까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고마운데 답답해." JTBC 토일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에서 지우(원지안)는 복잡한 감정을 그렇게 표현한다. 고마움과 답답함. 무엇이 고맙고 무엇이 답답한 걸까.

그녀는 언니 지연(이엘)이 알츠하이머 증상을 겪고 있고, 그것이 그녀의 남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지연의 상황을 경도(박서준)가 이미 알고 있었고 돕고 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그러니 고마움은 언니를 도왔기 때문인데, 답답함은 또 뭘까.

여기에는 보다 섬세하고 디테일한 감정이 섞여 있다. 사실 지연이 그런 상황인 줄 모르고 해외로 떠나려 했던 지우다. 그런데 그런 지우를 경도가 공항에서 붙잡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지우는 내심 경도가 자신을 그만큼 사랑해서 공항까지 달려왔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우는 지연의 부탁으로 경도가 자신을 붙잡은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지연은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지우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사실 슬쩍 지나가는 한 장면 속 감정일 수 있지만, 이 장면에서 원지안은 지우의 복잡한 심경을 잘 표현해낸다. 경도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우선이었으면 하는 욕심 같은 것이 뒤섞인 감정을 얼굴에 담아낸다. 무엇보다 그 표현이 실제처럼 자연스럽다. 그래서 되돌아보면 원지안이 연기한 지우라는 인물이 꽤 복합적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자림어패럴이라는 기업의 2세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그녀는 엄마가 밖에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사생아다. 엄마는 그 죄책감 때문에 딸을 비난했다. 물론 아버지는 지우를 사생아가 아닌 자신의 친딸처럼 살뜰하게 키우려 했지만 엄마의 그런 모습은 그녀가 밖으로 돌게 된 이유가 됐다. 다 가진 재벌가 2세처럼 늘 밝고 당당해 보이지만, 지우의 그 밝음과 당당함은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상처들이나 연약함을 애써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 시절부터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쌓인 상처에 묶인 존재였던 것.

원지안은 지우의 이런 면면을 꽤 잘 소화했다. 평상시 친구들과 또 경도와 함께 어우러지며 놀 때는 아무런 그늘이 없는 인물처럼 보이다가, 사고를 당한 아버지를 간병하며 경도와 떨어져 지내게 되자 지우는 극도의 불안감과 외로움에 흔들린다. 또 자신의 삶이 경도와 너무 다르다는 걸 그 흔한 돈가스와 옷 한 벌로 알게 된 후, 그녀는 스스로 경도를 떠난다. 경도에게도 또 자신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상의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다.

<경도를 기다리며>는 결국 서로 다른 삶을 가진 경도와 지우가 꽤 긴 세월을 거쳐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멜로드라마다.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따온 제목처럼, 이 두 사람은 서로 엇갈리면서도 서로를 계속 기다린다. 경도는 자신이 끝내 오지 않는 고도와는 다르다고 했다. 기다리면 끝내 올 거라고. 그래서 경도는 지우를 기다리고, 지우는 경도를 기다린다.

그 엇갈림이 꽤 긴 시간 동안 서로 다른 궤적을 도는 행성들처럼 오래 이어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 인물들을 보다 긴 호흡으로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지우가 뻔한 재벌 2세가 아니라 똑같이 상처받고 아파하고 또 성장해가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어서 이 인물은 매력적이다. 이 지점은 원지안이라는 배우가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 훨씬 심도 깊은 연기로 시청자들을 매료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고마움과 답답함이 교차되는 복잡한 심경 또한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경도야 내 이 마음이 뭔지 잘 모르겠어. 헤매는 나 대신해서 네가 언니를 지켰는데 나는 왜 이기적이 게 공항 생각이 났을까? '경도가 날 사랑해서 잡은 게 아닌가? 언니가 부탁해서 할 수 없이..' 지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잖아. 근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지..."

지우의 그 말에 경도 또한 복잡한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이것 역시 유영아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나도 있잖아. 지우야. 너 만나러 공항에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지우 언니가 아픈 게 나한테 명분이 돼 주는구나.' 내가 무슨 명분으로 널 잡을 수 있겠어? '나는 할 수 없이 서지우를 잡아야 된다.' 그딴 생각하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놈이잖아. 근데 그땐 다 모르겠고 '너만 떠나지 않는다면, 다시 혼자가 된 네가 가까이 있게 된다면, 그 생각밖에 못 했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해야 돼?"

경도의 그 말은 지연의 상황이 명분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어떤 지푸라기 같은 명분이라도 내세워 지우를 붙잡고 싶었다는 고백인 셈이다. 지우는 그제야 고마운데 답답한 그 복잡한 마음이 풀린다. 경도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새삼 알게 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지우가 말한다. "안아 줘." 그 안아달라는 말은 위로해달라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랑한다는 그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 인상적인 장면이 떠올린 단상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것이지만, 사실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득력 있게 연기해 보여준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그 인물이 가진 상처 때문에 덧난 삶의 질곡들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경도의 입장에서 보면 지우는 너무나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인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인물을 설득시키고 나아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 원지안이라는 배우가 새삼스레 보이는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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