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부터 1000만 배우까지 한 편의 영화 였던 연기인생

정시우 객원기자 2026. 1. 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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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 안성기를 기리며

- 부친 영향으로 만 5세 배우 데뷔
- 韓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 첫 1000만 관객 동원 ‘실미도’ 등
- 영화 산업 도약·성장 상징 인물
- 정부, 고인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이처럼 잘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연기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이타적인 행보를 보여주며 타의 모범이 돼 왔던 안성기 이야기다. 69년간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관객에게 웃음과 위안과 기쁨과 눈물을 선사해 왔던 안성기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였다. 안타깝게도 안성기라는 영화는 막을 내렸지만, 카메라에 저장된 기록을 통해 그의 이야기는 영원히 재생될 것이다.

고 안성기가 2021년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지난 5일 별세한 그는 ‘국민배우’이자 ‘한국영화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연합뉴스


국민배우 안성기가 5일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이날 오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사인은 기도 폐쇄에 의한 뇌사.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기도를 막는 사고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9년 혈액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면서도 최근까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치며 복귀 의지를 다졌기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배우 안성기가 출연했던 영화들. 위부터 ‘고래사냥’ ‘투캅스’ ‘하얀전쟁’. 한국영상자료원 KMDb 캡처·연합뉴스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곧 한국 영화의 역사다. 한국 영화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안성기라는 존재가 있었다. 1952년생인 안성기는 만 5세였던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부친이 김기영 감독과 친구였던 인연이 그를 운명처럼 영화계로 이끌었다. 10대 부랑아들을 다룬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도 받았다. 이는 한국 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기록이다.

이후 70여 편의 영화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다가 중3 때 찍은 ‘젊은 느티나무’(1968)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멈췄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입학한 안성기는 베트남전에 참전하려고 ROTC에 지원했지만, 제대도 하기 전에 전쟁이 종식되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베트남어로는 취업이 어려웠던 것. 시대적 상황은 그가 다시 영화계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1977년 아버지가 기획한 김기 감독의 ‘병사와 아가씨들’로 복귀했지만, 결과는 흥행 참패. 그러나 중국집 배달부를 연기한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안성기 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 안성기는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허리였다. 동시에 방황하는 청춘들의 대변자였고, 패기 넘치는 젊은 감독들의 동반자였다. 그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9) 등에 출연하며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1990년대엔 사회적 메시지를 품은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과 ‘하얀전쟁’(1992), 코미디 영화 ‘투캅스’(강우석·1993), 멜로 ‘그대 안의 블루’(이현승·1992), 액션누아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1999) 등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강우석·2003), 공권력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부러진 화살’(정지영·2012)에도 어김없이 안성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국영상자료원이 2017년, 안정기의 데뷔 60주년 특별전을 열며 명명한 행사 제목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이였다. 대개 감독의 분신을 뜻하는 ‘페르소나’라는 말 앞에 연출자가 아닌 ‘한국영화’가 쓰인 것은 안성기가 유일하다.

안성기가 국민 배우로 불린 데에는, 스크린 밖에서 보여준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바른 품성과 철저한 자기 관리, 후배에게도 자신을 낮추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됐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38년간 동서식품 커피 ‘맥심’의 최장수 모델로 활동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짧은 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광고는 모델의 이미지에 까다로운 잣대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냉엄한 시장에서 38년이나 장수한 것은 그가 어떤 배우로 대중에 인식되었는가를 증명해 보인다.

정부는 그런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추서 배경에 대해선 “1990∼2000년대 한국영화의 대중적 도약과 산업적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한국영화의 사회적·문화적 외연 확장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오는 9일 오전 6시. 장지는 양평별그리다다.

정시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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