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결과, 문제는 성장이다[이윤학의 삼코노미]
환율은 체온계와 같다. 그 숫자는 대체로 정확하지만, 체온계가 알려주는 것은 단지 ‘열이 있다’는 사실일 뿐, 왜 열이 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해열제를 복용하면 수치는 잠시 내려가지만 몸속 염증이 남아 있다면 열은 다시 오른다. 현재 한국 경제의 환율 논쟁이 딱 이런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우리는 즉각 금리차를 떠올린다. 미국이 금리를 낮추고 한국은 동결했는데 왜 원화가 약해졌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환율은 단기적인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가 아니라 이미 방향을 바꾼 해류에 더 가깝다.
금리차로 환율을 설명하는 이론은 교과서적으로 유효하지만 현실의 환율은 금리보다 성장률, 더 정확히는 성장에 대한 확신을 반영한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 연 4~5% 성장을 일상적으로 누리던 나라였다. 당시 환율은 위기가 아니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의 탄력은 눈에 띄게 낮아졌고, 한국은행 등 연구기관들은 한국의 잠재 성장률을 2% 안팎으로 보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전망이다. 2023년 이후 2027년까지의 성장률 예상치는 대체로 1%대 중후반에 머물고 있다. 아직 확정된 통계는 아니지만, 시장이 이 기간을 두고 ‘잃어버린 5년’을 우려하는 이유다. 환율은 과거의 성적표가 아니라 앞으로의 성장 기대치를 냉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무역수지를 살펴봐도 환율의 움직임은 직관적이지 않다. 한국은 최근 무역수지를 다시 흑자로 돌려세웠다. 수출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회복됐고, 에너지 가격 안정도 도움이 됐다. 과거라면 이 상황은 원화 강세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들어오는 달러가 국내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환율을 설명하는 중심축은 경상수지가 아니라 자본의 방향성으로 이동했다.
2014년은 한국의 순대외 금융자산이 처음으로 흑자 전환된 해다. 이후 해외 투자는 구조적으로 확대됐고, 2024년 말 기준 한국의 순대외 금융자산은 약 1조1023억달러로 사상 최초로 1조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한국이 외화를 벌어 쌓아두는 나라에서 외화를 해외로 분산하는 나라로 구조적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경상수지가 흑자여도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 이유는 벌어들인 달러보다 해외로 투자하는 달러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해외 증권 투자가 있다. 2014년 말 기준 한국 거주자의 해외 증권 투자 잔액은 약 2063억달러에 불과했으나, 개인과 기관의 해외 투자가 일상화되며 2025년 1분기 말에는 1조118억달러로 1조달러를 넘어섰다. 불과 10여년 만에 5배 가까이로 증가한 셈이다. 중요한 점은 이 자금의 성격이다. 단기 차익을 노리고 치고 빠지는 돈이 아니라, 연금처럼 장기 투자의 성격을 지닌 자금이다.
결국 원화가 강세를 보일 때마다 해외 자산을 더 사들이는 구조가 형성됐다. 원화 강세가 자금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해외 투자의 신호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기업의 행동도 변화하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 대기업들은 더 이상 달러를 벌어 즉시 원화로 바꾸지 않는다. 해외 공장과 설비 투자, 현지 인수·합병이 늘어나면서 달러 매출은 해외에서 다시 사용된다.
자연 헤지와 현지화가 일반화됨에 따라 수출이 늘어도 국내 외환시장에 공급되는 달러는 줄어들고 있다. ‘수출 호황은 원화 강세’라는 과거 공식이 이제 무력화되고 있다.
결국 지금의 환율은 성장 둔화와 해외 자산 축적이 동시에 진행된 구조적 결과다. 따라서 환율은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환율을 낮추기 위해 정부의 구두 개입이나 정책적 대응이 가능하지만, 체온계의 숫자를 낮추는 것과 몸을 회복시키는 것은 다르다. 성장이라는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 한, 환율은 계속 불편한 신호를 보낼 것이다.
우리는 열이 난다고 체온계를 탓하지 않는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환율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문제는 성장이다. 해열제가 아니라 체력이 필요하다. 체온계가 보내는 불편한 경고를 소음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환율은 이미 답을 말하고 있다.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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