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소멸의 시대, 길 잃은 공룡들의 딜레마
로열티 사라진 시대, 레거시의 생존법
(시사저널=김하빈 한양대 연구원(패션마케팅 박사))

불과 십수 년 전, 패션의 문법은 명확했다. 파리와 밀라노가 트렌드를 선포하면 대중은 이를 모방하며 안도감을 느꼈다. 유행을 따르는 것이 곧 세련됨이자 소속감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 대한민국 성수와 한남의 풍경은 다르다. 고프코어와 발레코어, 빈티지와 그런지 룩이 한 공간에 혼재한다. 거대한 메가 트렌드는 사라졌다. 이제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말은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바야흐로 '유행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흐름이 된 '안티-트렌드(Anti-Trend)'의 시대다.
브랜드 로열티의 종말과 '추구미'의 부상
엄밀히 말해 스타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숏 푸퍼나 카고 팬츠 같은 인기 아이템은 존재한다. 핵심은 "스타일은 소비하되, 브랜드에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태도의 변화다.
과거 소비자가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면, 지금의 소비자는 자신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정의한다. 이들에게 브랜드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추구미(추구하는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름값(Name Value)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명품 가방에 다이소 키링을 다는 '백꾸' 유행처럼, 브랜드의 권위보다 내 취향의 배합이 상위 가치다. 이제 패션은 "어느 브랜드냐"가 아니라, "어떻게 셀렉(Select)하고 조합(Mix)했느냐"는 감각의 싸움으로 재편되었다.
알고리즘의 우주와 마이크로 취향의 범람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리에 나오게 된 것일까? 그 기술적 배경에는 디지털 알고리즘이 빚어낸 '취향의 파편화'가 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의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머무는 0.5초의 시선을 포착해 그가 좋아할 법한 스타일을 무한히 확장해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펑크 록 스타일만, 누군가에게는 비건 패션만 노출된다. 결국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기 다른 패션 타임라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마이크로 취향의 범람 속에서 '전 국민적인 유행'이 탄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러한 환경은 소수 점유율을 가진 '니치(Niche)' 브랜드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메가 브랜드들은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다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반면, 확실한 팬덤을 거느린 작은 브랜드들은 알고리즘을 타고 전 세계의 마니아들과 연결된다.
레거시의 역설, 거인들은 왜 멈춰 섰나
소비자들은 이토록 자신의 '추구미'를 완성해 줄 뾰족한 아이템을 찾아 헤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패션 산업을 이끌어온 거대 기업들, 이른바 '레거시 기업'들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주요 패션 대기업들의 신규 브랜드 런칭이 뚝 끊겼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한섬, LF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자체 브랜드 육성보다는 해외 유명 브랜드를 수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효율과 숫자에 매몰된 거대 기업들이 안전한 선택을 하는 동안, 백화점 1층과 온라인 편집숍은 '러프사이드', '아워셀브즈', '아캄' 같은 비제도권 브랜드들이 장악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의 기저에는 '생산 인프라의 진화'가 있다. 과거 고품질 의류 생산은 거대 자본과 공장 라인을 소유한 대기업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생산 에이전시(프로모션)와 연계 플랫폼이 고도화되면서, 소규모 브랜드도 얼마든지 높은 퀄리티의 제품을 소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진입장벽이 낮아지니, 작고 날렵한 스몰 브랜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은 소비자의 세분화된 '추구미'에 딱 맞는 아이템을 마치 맞춤 정장처럼 제안하며 틈새를 파고든다.
반면, 레거시 기업들은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기획부터 생산까지 6개월이 걸리는 대기업 시스템은, 아이디어 하나로 2주 만에 제품을 내놓는 스몰 브랜드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규모의 경제'를 위해 대량 생산을 고집해야 하는 덩치는, 다품종 소량 생산이 미덕인 현시점에서 치명적인 족쇄가 되어버렸다.

'제조업자' 마인드를 버리고 '취향의 큐레이터'가 되어야
브랜드 로열티가 소멸한 시대, 거대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첫째, '복제'가 아닌 '인큐베이팅'으로 선회해야 한다.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LF의 '던스트'나 코오롱의 '아카이브 앱크'가 정답을 보여준다. 이들은 대기업 조직이지만 독립된 인디 브랜드처럼 움직인다. 기업은 자본과 인프라만 제공하고, 브랜드의 영혼은 독립적인 디렉터에게 온전히 맡기는 '사내 벤처'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둘째, 수입 브랜드 의존증에서 벗어나 자생적인 '팬덤'을 구축해야 한다. 매출 방어용 수입 브랜드는 기업의 자생력을 갉아먹는다. 소비자는 이제 로고가 아닌, 자신의 '추구미'를 대변할 확실한 맥락을 원한다. '아더에러'나 '떠그클럽'처럼 옷이 아닌 '문화'를 팔아야 한다. 타협 없는 세계관으로 팬덤을 구축할 때, 브랜드는 비로소 소비자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필수 '재료'로 격상된다.
마지막으로, '머스트 잇(Must-it)'은 멈추고 '디깅(Digging)'의 즐거움을 허해야 한다. '놓치면 후회할 대세 아이템'이라는 카피는 이제 공급자의 오만이 담긴 소음일 뿐이다. 남들과 같아짐을 경계하는 이들에게 '대세'는 오히려 함정이 된다. 기업은 확성기를 내려놓고, 소비자가 스스로 가치를 발굴할 수 있도록 단서를 숨겨두는 전략을 써야 한다. 소비자는 '광고'가 아니라, 자신의 안목으로 '발견'했다는 성취감을 산다.
파도는 막을 수 없지만, 서핑은 할 수 있다
대세가 없는 시대, 이것은 기업에게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메가 트렌드를 쫓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수천 개의 마이크로 트렌드 속에서 확실한 '한 줌의 취향'을 낚아채야 산다.
레거시 기업은 단일 브랜드의 양적 확장이 아니라, 다각화된 브랜드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선회해야 한다. 소비자는 더 이상 기업의 거대한 간판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작더라도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에 반응한다. 결국 패션의 미래는 관리된 시스템의 효율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브랜드 고유의 철학에 달려 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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