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배우’ 안성기 별세…한국 영화의 한 시대, 조용히 막 내리다

곽성일 기자 2026. 1. 5. 16:3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70편 넘는 작품으로 시대의 얼굴이 된 배우, 혈액암 투병 끝 향년 74세로 영면
과시 없는 연기와 품격의 태도, 스크린에 남은 인간 안성기의 시간
▲ 국민 배우 안성기가 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성기는 2020년대 초까지 60여년 동안 140여편에 출연한 '국민 배우'다. 영화 '인정사정 볼것 없다'·'투캅스'·'라디오스타'·'실미도' 등으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2019년부터 혈액암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왔고 2022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처음 이 사실을 털어놨다. 투병 중에도 2023년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 등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귀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사진은 지난 1994년 서울 중구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제3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투캅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트로피를 들어 보이는 안성기.연합

'국민 배우' 안성기가 5일 오전 9시께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 향년 74세. 2019년부터 혈액암 투병을 이어온 그는 최근 회복에 전념하며 작품 복귀를 준비하던 중 지난달 말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안성기는 배우라는 말이 직업이기 이전에 태도임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는 늘 장면의 앞자리를 양보했다. 감정을 과시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인물의 숨결이 관객에게 닿도록 조용히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배우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가 스쳐 간 흔적으로 남았다.

1957년 다섯 살의 나이에 영화에 첫발을 디딘 뒤 안성기는 한국 영화와 거의 같은 시간을 살아왔다. 아역 시절부터 이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학업으로 잠시 현장을 떠났다가 성인이 된 뒤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을 기점으로 그는 단숨에 한국 영화의 중심에 섰다. 이후 1980년대의 사회적 리얼리즘, 1990년대 산업화 이후의 장르 영화, 2000년대 대중영화의 확장까지, 한국 영화의 변곡점마다 그의 연기가 있었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특별하지 않았다. 가난한 청춘, 방황하는 지식인, 전쟁의 상흔을 안은 군인, 웃음 뒤에 상처를 숨긴 중년 남자.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 관객은 자신을 발견했다. 안성기는 영웅을 연기해도 영웅처럼 군림하지 않았고 비루한 인물을 맡아도 그 비루함을 소비하지 않았다. 언제나 인간을 남겼다.

17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그는 한국 영화의 체온을 지켜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네 개의 시대에 걸쳐 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라는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현장에서 남긴 신뢰였다. 큰 소리 없이도 질서가 생겼고 후배들은 그의 등을 보며 배웠다. 연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밀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영화 밖에서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친근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오랜 시간 대중 곁에 머물렀지만 그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익숙함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드문 배우였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동료 배우들과 영화인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한다. 스크린 위에서는 수없이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마지막 장면은 유난히 조용하다.

그러나 퇴장은 끝이 아니다. 안성기가 남긴 연기는 여전히 한국 영화의 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어떤 얼굴로, 어떤 거리에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그는 평생 보여줬다. 우리가 한국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 속에서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불릴 것이다.

박수는 잦아들지 않는다.

안성기. 한 시대가 그렇게 고요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