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던 배우 안성기, 하늘의 별로

60여 년 대한민국 영화계의 중심을 지켜온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화려한 스타이기 이전에 남다른 인품으로 존경받아온 배우 안성기(75)가 5일 오전 9시 별세했다. 안성기는 2020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도 연기와 자선 활동을 이어왔으나 지난달 31일 자택에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하늘의 촬영장으로 떠났다.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안성기는 여섯 살 때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1957) 아역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부친 안화영씨가 김 감독과 친구였던 인연이 그를 영화로 끌었다. 이후 약 70편에서 주로 개구쟁이 역할을 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찍은 ‘젊은 느티나무’(1968)를 끝으로 10년 정도 활동을 멈췄다.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가 생각한 자신의 미래는 ‘보통 사람’이었다. 1976년 제대하고 취업 원서를 낸 기업마다 고배를 마시면서 예상과 다른 인생의 문이 열렸다. 영화 기획 일을 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계몽영화 ‘병사와 아가씨들’(1977) 조연을 맡으며 다시 배우가 됐다. 훗날 그는 복귀 무렵을 술회하며 “기왕 하는 거 평생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다짐을 지켰다.

본격적인 배우의 길은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의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으로 시작됐다. 그는 “덕배를 연기하며 캐릭터가 주는 매력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1950년대에 출발해 2020년대를 아우르는 그의 출연작은 170여 편을 헤아린다. 원본이 유실된 작품까지 합하면 약 200편으로 추정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7년 그의 데뷔 60주년 특별전을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으로 명명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국영화사가 그대로 담겼다는 뜻이었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은 그의 연기는 폭넓고 변화무쌍했다. 흔히 말하듯 ‘거지(‘고래사냥’)에서부터 대통령(‘피아노 치는 대통령’, ‘한반도’)까지 두루 연기했다. 특히 과잉을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한 표현에 담긴 비애와 웃음의 진폭이 독보적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안성기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 생겨났을 때 그걸 해낼 수 있는 배우”라고 했다.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칠수와 만수’(1988), ‘개그맨’(1988), ‘하얀 전쟁’(1992), ‘투캅스’(1993), ‘태백산맥’(1994), 최초의 천만영화인 ‘실미도’(2003), ‘라디오 스타’(2006) 등 수많은 작품으로 사랑받았다.

오랜 기간 정상에 있었으나 성실하고 절제된 자세로 흔한 스캔들조차 한 번 없었다. 신의와 예의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자택에 전화기 두 대를 두고 한 대에는 자동응답기를 설치해 어떤 용건이든 받아뒀다가 잊지 않고 답을 한 걸로 유명했다. 시나리오를 거절하더라도 직접 만나서 했다. “그게 살아가는 일이고 예의”라고 했다. 추운 날 촬영했던 영화 ‘투캅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모닥불을 피워놔 제때 나타난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성실함은 정치적 진영까지 무화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1997년 15대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가 공히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꼽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고사했고, 수차례 국회 비례의원직도 제안받았으나 한사코 거절했다. “현장에서 제가 얼마까지 갈 수 있는가에 인생을 걸고 있다”며 오직 배우를 고집했다. “나중에 후배들이 호흡을 길게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싶다”고도 했다.
국내 3대 영화 시상식인 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모두 받았다. 1982년 제2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철인들’)을 시작으로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남자 최우수연기상(‘부러진 화살’)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꾸준히 정상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20년 10월 열흘 넘게 입원하며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으나 2021년 5월 개봉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복귀했다. 2022년에도 알츠하이머 딸을 돌보는 아버지 역의 ‘카시오페아’, 한산 앞바다의 물길을 꿰고 있는 장수 어영담으로 출연한 ‘한산: 용의 출현’에서 잇따라 관객을 만났다. 같은 해 9월, 1년 넘게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사실이 본지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지며 응원 메시지가 쇄도했다. “출연 중인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은 병마의 시련보다 더 큰 고통”이라며 약을 먹어가며 ‘한산’ 촬영장으로 향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가발을 쓴 수척한 모습으로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해 “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며 촬영장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항암 치료 중에도 이사장 직을 맡고 있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영화인 자녀 장학사업, 단편영화 제작지원사업 일정에 힘껏 참석했다. 병마의 위기를 넘기고 나서는 “환자들이 친구처럼 다가왔다”며 치료 중이던 서울성모병원에 1억원을 기부했다. 1993년부터 30년 넘게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일하며 해외 10여 개국 구호 현장을 찾았다. 자살 예방 캠페인 365생명사랑운동의 공동대표를 맡아 이웃을 돌보는 데에도 앞장섰다.
자신의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한 영화는 ‘라디오 스타’였다. “자극적이지 않고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라서 좋다”고 했다. 그 자신이 그런 배우였다. 자극적이지 않고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기로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 진정한 ‘국민 배우’였다.
정부는 이날 그에게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가 주관해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회 명예위원장은 원로 배우 신영균, 위원장은 이갑성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배창호 감독 등이 맡았다. 운구 조사는 배창호 감독과 정우성이 낭독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아내 오소영 씨와 아들 안다빈·필립, 며느리 이서희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 발인은 9일 오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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