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평양 외교관들이 침묵 속에 묻어둔 생각

이일규 前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치참사 2026. 1. 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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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사업 ‘전투’ 시작
성과 부풀리고 결함 감추고
감시하며 침묵으로 위로
北 체제 무너질 리 없고
엘리트는 불안하고 무력해
침묵만이 그들을 보호한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일 부인 리설주, 딸 주애와 함께 김일성 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2일 보도했다. /뉴시스

북한에는 “설날은 술날”이라는 말이 있다. 한 해를 보낸다고 한 잔, 새해를 맞는다고 한 잔, 어르신과 스승·선배들에게 새해 인사를 다닌다고 또 한 잔 마시다 보면 사흘 남짓한 휴일이 술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초의 외무성은 다르다. 지금쯤 북한 외무성에 있는 나의 옛 동료들은 지도부에 보고를 한 뒤 받은 ‘2026년 대외사업방향’ 초안을 해외 공관에 하달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새해 시작 전부터 외교관들은 ‘첫 전투’에 돌입한다. 대외사업방향이란 한 해 동안 북한 외교가 견지해야 할 총체적 노선과 지역별·국가별 전술을 담은 작전계획서다. 4대 강국 외교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 개발도상국 외교, 그리고 북한이 ‘적대세력’으로 규정한 미국과 서방을 상대로 한 전술까지 망라된다. 외무성은 지도부가 비준한 이 지침을 외교전략의 실제 집행단위인 해외 대사관에 포치한다. 해외 공관들은 받는 즉시 집행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빨리 ‘성과’를 만들어내느냐로 평가받는다.

새해가 되면 해외 파견 외교관들의 일정은 정해져 있다. 주재국 고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체제의 ‘위대성’을 설명하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남북 관계 단절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반복한다. 반응을 본국에 보고한다. 문제는 그 반응이 곧 해당 국가의 ‘대북 동향’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외교관들은 면담자의 말 가운데 긍정적인 표현만 골라 부풀려 보고한다. 부정적인 신호는 곧바로 ‘외교적 성과 부족’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주재국 국가수반이나 친북 단체,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북한 지도부에 신년 축전을 보내도록 설득하는 일도 이 시기의 핵심 업무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니카라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전통적으로 북한에 우호적인 나라의 공관들은 수월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유럽의 공관들은 이 시기가 가장 고통스럽다. 실적은 적고, 비판이 쏟아진다.

이렇게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나면 평가의 시간이 다가온다. 매월 마지막 주, 대사관들에 전문으로 배포되는 ‘월 사업 총화’에서는 모든 공관의 성과와 결함이 공개된다. 어느 대사관의 누구는 “공화국의 핵보유국 지위를 주재국 인사들에게 각인시키고 좋은 반응을 받아냈다”며 칭찬을 받는다. 반면 어디의 누구는 “주재국의 대북 동향이 나쁘다는 걸 빙자해 패배주의·요령주의에 빠져 주요 인사를 만나지 못했다”며 공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외교관의 이름은 기록으로 남고, 귀국 후 총화와 인사, 승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총화 전문을 받은 날 밤이 되면 외교관들은 친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상처를 씻어주는 데 술보다 좋은 약이 없다”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며 또 한 달을 버틴다. 그러나 그 술자리에서도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북한 외교관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도록 설계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북한 외교관은 모두 체제에 충성하는 엘리트다. 실제로 김정은 체제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굳게 믿는 외교관도 적지 않다. 동시에 자신의 경력 발전과 가족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외교관도 많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충성의 표현’이라 여기며 지혜를 짜낸다. 문제는 그 충성이 신념이든 계산이든, 마음속 불안까지 지워주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외교관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빨리 읽는다. 워싱턴과 베이징, 모스크바의 기류 변화, 유엔 회의장에 감도는 냉기, 국제 언론의 논조, 심지어 면담자의 표정까지 가장 먼저 체감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외교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군사와 선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북한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또 다른 균열을 만든다. 해외에서 다른 사회를 직접 본 외교관들은 체제 선전과 현실의 괴리를 부정하기 어렵다. 평양 간부 자녀들의 특권과 일반 주민들의 궁핍한 삶을 떠올릴 때, 체제의 ‘정당성’은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그 고민은 말할 수 없다. 침묵만이 그들을 보호한다.

북한 외교관들의 침묵은 체제의 경직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상황을 신중하게 읽는 신호일 수도 있다. 평양의 외교관들은 오늘도 말없이 보고서를 쓰고 성명을 읽는다. 그 조용한 태도 밑에는 냉정하게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가늠하는 그들의 심경이 깔려 있다.

“누구도 나의 운명을 지켜주지 않는다. 나와 가족의 운명은 나만이 지킬 수 있다. 세상이 열두 쪽 나도 이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응하며 살아갈 길을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침묵 속에 그들이 묻어둔 생각이다.

1월 4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북한 탄도미사일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합참은 북한이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 도발을 "우리는 베네수엘라처럼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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