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원칙 없는 급여 확대, 건강보험 위기 부른다

허지윤 기자 2026. 1. 4. 06: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폰히펠-린다우 증후군(VHL).' 이름도 낯선 이 병은 평생 신체 기관 곳곳에 다발적으로 종양이 생기는 유전 질환이다.

국내에선 허가 승인 이후 세 차례나 건강보험 급여화에 도전했지만, 지난달 또 불발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 초음파·CT·MRI 등 비급여 영상 검사를 대거 급여로 전환하자, 환자가 당장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은 줄었지만, 의료 현장 전반에서 불필요한 검사가 남용돼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폰히펠-린다우 증후군(VHL).’ 이름도 낯선 이 병은 평생 신체 기관 곳곳에 다발적으로 종양이 생기는 유전 질환이다. 전 세계 환자 수는 약 20만 명, 국내 환자 수는 200명 이내로 추정된다.

2021년 세계 첫 치료제 ‘웰리렉’이 세상에 나왔다. VHL 유전자 결함으로 과활성화된 전사인자 단백질 HIF-2α를 표적으로 삼는 유일한 신약으로, 종양 크기가 줄거나 더 자라지 않는 효과를 낸다. 의학계에선 20년 이상의 기초과학 연구와 10년 이상의 약물 개발이 집약된 혁신적 신약으로 평가된다.

신약의 등장은 환자들에겐 새 희망이다. 이전엔 종양을 떼도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다른 부위에 새 종양이 또 생기기 때문에, 환자들은 종양이 커져 생명을 위협할 때마다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한국에선 이 약이 2023년 승인됐지만, 건강보험 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다. 국내 환자들의 한 달 치 약값은 약 2220만원, 1년엔 약 2억7000만원에 달한다. 국내에선 허가 승인 이후 세 차례나 건강보험 급여화에 도전했지만, 지난달 또 불발됐다. 초고가인 데다 환자 수는 매우 적고 그만큼 전체 생존 개선 데이터도 부족하니 심의 기준을 넘지 못한 것으로 제약업계에선 보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은 한정적이다. 모든 신약과 치료법에 급여 적용을 해줄 수 없다. 그래서 ‘질병 치료, 중증 질환’ 중심으로 건강보험 제도를 운용하자고 사회적으로 합의해,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 기구를 거쳐 과학적 근거, 환자 수, 경제성(비용 효과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우선순위를 매겨 자원을 분배한다.

그런데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원칙을 흔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생존의 문제”라는 표현을 하며 탈모의 건강보험 적용 확대 검토를 지시했고, 현재 보건복지부는 다양한 지원 방안을 검토 중이다. 외모 평가가 심한 대한민국에서 점점 줄어드는 머리숱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솔깃한 소식이다.

하지만 생존과 직결된 질환 치료제도 엄격한 심의 기준을 넘지 못해 번번이 급여화에 실패하는 게 현실인데, 탈모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논의 대상에 오르는 건 모순적이다. 이미 질병성 탈모 치료제는 급여 대상이다. 탈모 급여화 논의에 불이 붙자 일각에선 비만 치료제, 치과 임플란트 등부터 보장 범위를 더 확대해 달라는 말도 나왔다.

건강보험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초음파·CT·MRI 등 비급여 영상 검사를 대거 급여로 전환하자, 환자가 당장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은 줄었지만, 의료 현장 전반에서 불필요한 검사가 남용돼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특히 우선이 돼야 할 ‘필수 의료’에 자원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해, 필수 의료 영역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게 의료계 전반의 지적이다.

저출산·고령화로 국민이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료의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포퓰리즘식 급여화가 반복된다면, 건강보험은 결국 모두가 조금씩 더 쓰다 함께 무너지는 ‘공유지의 비극’을 피하기 어렵다.

건강보험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적 인기와 맞바꾼 청구서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의 책상 위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