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500원 넘보는 한국 경제…‘고환율 뉴노멀’ 속 책임 공방만
원인 두고 ‘이창용 vs 서학개미’ 충돌…“1분기가 가장 불안한 상황”
(시사저널=허인회 기자)
1500원을 넘보던 원-달러 환율 오름세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한풀 꺾였다. 하지만 사상 처음으로 연평균 환율 1400원대 기록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1400원대 환율이 '뉴노멀'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환율 상승→수입물가 상승→물가 자극→소비·투자 위축'이란 구조적 악순환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고환율이 2026년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역대 세 번째 높은 종가로 2025년 마감
2025년 원-달러 환율은 1439.0원으로 마감했다. 1997년(1695.0원)과 2024년(1472.5원)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높은 연말 종가다. 주간 종가 기준으로 집계한 2025년 평균 환율은 1421.9원으로 외환위기 당시였던 1998년(1394.97원)을 웃돌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5년 환율은 비상계엄 후폭풍과 한미 관세 협상 영향으로 4월9일 1484.1원까지 치솟았다. 이후 안정을 찾은 환율은 1400원대 초반에서 오르내렸다. 하지만 11월 들어 기류가 달라졌다. 11월18일을 시작으로 26거래일 연속 1460원대가 넘는 종가를 기록한 데 이어 12월22~23일엔 이틀 연속 1480원을 넘어선 채 거래를 마쳤다. 이는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12일(1496.5원)과 13일(1483.5원) 이후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지난해 막바지에 결국 외환 당국이 나섰다. 12월24일 "원화의 과도한 약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강한 구두개입 메시지를 발표한 것이다. 서학개미(해외주식 투자자)들을 국내 증시로 돌리기 위한 정책도 같은 날 발표됐다. 12월26일에는 국민연금이 전략적 환헤지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대책을 총동원하며 1500원 돌파는 막았지만 연평균 1400원대 환율은 벗어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환율 급등이 경제 불안에 따라 급격한 외화 유출이 발생했던 과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원인이 다르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초로 7000억 달러 수출 금자탑을 쌓았고, 대외 건전성 지표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서다. 대신 한미 기준금리 차이(1.25%포인트)와 개인과 연기금, 기업의 대규모 해외투자 등 복합 요인이 맞물렸다는 분석이다. 경제 주체들의 적극적인 해외투자로 인해 수출로 벌어들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달러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고환율 국면에서 책임 공방도 벌어졌다. 먼저 논란의 불씨를 지핀 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였다. 이 총재는 지난해 11월27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환율이) 1500원을 넘는다면 한미 금리 차도, 외국인 투자가도 아닌 해외주식 투자 때문"이라며 "젊은 분들이 하도 해외투자를 많이 해서, 왜 이렇게 해외투자를 많이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쿨하잖아요' 이렇게 답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환율 급등 원인을 놓고 '서학개미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후 12월17일 기자설명회에서 "수급 요인만 얘기하니까 남을 탓한다는 그런 지적이 많은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실제로 국내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주식은 전년 대비 크게 늘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4일 기준 개인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보관금액은 약 1685억 달러(약 242조원)다. 2024년 말(1121억 달러) 대비 50.3% 증가했다. 채권의 경우 2024년 113억 달러에서 지난해 193억 달러로 70.7% 급증했다. 보관금액은 신규 매입으로 잔액이 증가할 수도 있지만, 기존에 갖고 있던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이 올라 잔액이 늘 수도 있다. 2025년 개인투자자들의 주식과 채권 순매수 금액은 각각 326억 달러(약 46조8000억원), 97억 달러(약 14조원)였다.

"서학개미 투자 탓"…진짜 큰손은 국민연금
그러나 서학개미를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세력으로 단정 짓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이나 기관투자가들의 해외주식 증가 폭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2025년 1~3분기(1~9월) '일반정부'의 해외주식 투자는 총 245억1350만 달러(약 36조원)였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27억8540만 달러보다 91.7%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비금융기업 등'의 해외주식 투자는 95억6070만 달러에서 166억2450만 달러로 73.8% 늘어났다. 통계상 '일반정부'는 국민연금으로, '비금융기업 등'은 개인투자자로 해석한다.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투자 증가 폭이 더 크다는 의미다. 전체 내국인의 해외주식 투자에서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34.1%로, 개인투자자(23.1%)보다 높았다. 외환시장에 서학개미보다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자산 증식을 위한 서학개미의 해외투자를 유행 좇기로 치부한 이 총재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비난의 화살은 한국은행으로 옮겨갔다. 원화 약세를 초래한 근본적인 배경에는 한국은행의 유동성 과잉 공급이 깔려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은이 2025년 12월16일 발표한 '10월 통화 및 유동성'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광의통화(M2)는 역대 최대 규모인 4471조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월 대비 8.7% 증가한 수치이자 7개월 연속 증가세다. M2는 시중에 풀린 넓은 의미의 통화량을 나타낸다. 현금이나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수익증권,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을 포함한다.
문제는 시중에 유동성이 늘어날 경우 집값 상승을 부추기거나 해외주식 투자 여력이 생기면서 달러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율 상승에 한은의 책임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실제로 2025년 9월 기준 미국의 M2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4.5%에 불과했다. 반면 한국은 8.5%에 달했다. 2022년 이후 한국의 M2 증가율이 더 높다. 원화가 시중에 풀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보니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목소리가 늘어난 근거다.
정치권도 '한은 책임론'에 가세했다. 이언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창용 총재는 2022년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태가 일어나자 유동성을 공급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지속적으로 RP를 매입하고 최근에는 국고채도 매입했다"며 "단기유동성을 대거 공급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환율 급등의) 여러 원인 중에서도 한은의 통화 정책 실패, 한은 총재의 책무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꼬집기도 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한은은 "주택 가격과 환율 상승에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유동성 증가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이례적으로 반박에 나섰다. 한은은 '최근 유동성 상황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올려 "(원화 약세에는) 유동성 상황보다 거주자의 해외증권 투자 확대, 수출기업의 외화 보유 성향 강화 등 외환 수급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원인을 단지 유동성 증가로 몰고 가면 문제의 본질을 흐릴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통화량 증가 속도가 미국의 두 배에 이른다는 지적에는 시계를 넓혀서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은은 "2020년 3월부터 한미 M2 누적 증가율을 비교해 보면 각각 49.8%, 43.7%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미국은 M2에서 상장지수펀드(ETF) 등 수익증권을 제외하는 점 등을 감안해 조정하면 우리나라 M2 증가세는 미국과 대체로 유사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M2 증가율은 기준 방식을 적용하면 8.7%지만 수익증권을 제외하면 5.4%로 낮아진다. 이에 한은은 2026년 1월 공개되는 지난해 11월 통화량 통계부터 M2에서 ETF 등을 제외한 별도 통계를 발표하기로 했다.

"올 1분기 1500원 넘을 수도"
관건은 2026년 환율 추이다. 한은은 2026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1%로 전망하며 환율을 물가 상승의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그러나 1470원 안팎의 고환율이 유지되면 물가상승률이 2.3%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망은 좋지 못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금리 인하에 우호적인 인물을 차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으로 지명하겠다는 입장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임기는 2026년 5월까지다. 연준의 금리 인하는 시중의 자금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미국 증시에 유동성이 공급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미 금리 인하→달러 약세→원화 강세'라는 공식이 깨진 이상 미국의 금리 인하는 더 이상 한국 경제에 호재가 아니다. 더구나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예고하고 있다. 연준과 미 연방정부의 유동성 공급으로 미국 증시가 호황을 누릴 경우 서학개미의 미국행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문가들은 일단 2026년 1분기 환율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은 "1분기 환율이 1500원을 넘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통상 1월엔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3~4월엔 우리나라에 투자했던 글로벌 기업들이 회계연도에 맞춰 본국으로의 송금 수요가 있다"면서 "1분기 환율 상황이 가장 불안하다"고 내다봤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 증시의 인공지능(AI) 랠리가 얼마나 지속될지에 환율이 달려있다"고 진단했다. 양 교수는 "AI 랠리가 진정되거나 끝날 경우 투기적 달러 수요도 줄어들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1400원 안팎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다만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주 본부장은 "시장의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해법은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라고 밝혔다. 2020년 3월 한은과 연준은 600억 달러 규모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바 있다. 이후 환율은 40원 가까이 급락했다.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도 한국 정부는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제안했지만, 미국 측의 난색으로 무산됐다.
양 교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증시가 매력이 없다는 것"이라며 "투자 욕구가 많은 개인투자자 입장에서 투명하고 비전을 보여주는 미국 증시가 현명한 선택"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기업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고, 정부는 주식시장을 개혁해야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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