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피해자’여야만 승인되는 4.3희생자...“역사는 더 복잡하고 뜨거웠다”

법-제도는 본질적으로 구획적이다. 4.3특별법을 정점으로 한 진상규명의 제도화는 억울한 죽음을 공적으로 위로하는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누가 '국가로부터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심사하는 거대한 체계를 구축했다. 이 체계의 가장 촘촘한 그물망은 바로 '무고한 희생자'라는 프레임이다. 4.3 진상규명 운동이 대중적 지지와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무고한 희생'이라는 서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4.3의 역동적인 진실을 가두는 투명한 감옥이 되어가고 있다.
이 프레임 속에서 '희생자'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지향이나 능동적 의지도 갖지 않은,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4.3의 비극을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양민'의 서사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역사의 실체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뜨거웠다. 해방 직후 제주 공동체가 꿈꿨던 자치에 대한 열망,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정치적 결단, 그리고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의 고뇌는 '무고한'이라는 형용사 아래 소거된다. 법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 즉 무장대 지도부나 적극적 가담자로 분류된 이들은 여전히 '진실'의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한 채 법의 예외 지대에 남겨져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의 학살이다.
이러한 제도적 경계 짓기는 4.3운동, 특히 예술에 있어서 치명적인 자기검열을 작동시킨다. 국가의 예산이 투입되는 기념사업과 예술 프로젝트들은 자연스럽게 법이 허용하는 범주 안의 기억만을 재현하게 된다. 예술이 다뤄야 할 4.3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진 비극적 표정으로 규격화되고, 그 고통을 유발한 근원적인 권력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저항의 서사는 '이념적 편향'이라는 꼬리표를 두려워하며 위축된다. 결국 예술은 진실을 폭로하는 '송곳'이 아니라, 제도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수행되는 '추모의 장식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제도화가 4.3을 고립시킨다는 점이다. 4.3을 '국가 권력의 일탈에 의한 불행한 사건'으로 한정지으면, 당시의 학살을 가능케 했던 반공 독재의 구조적 메커니즘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4.3은 단순히 과거의 특정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반공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기계가 처음으로 대규모 가동된 현장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4.3을 개별화하고 파편화함으로써, 그 뿌리가 현재의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운동으로서의 4.3'이 직면한 과제는 이 견고한 법-제도의 문턱을 어떻게 횡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도가 부여한 '희생자 증명서'를 넘어서, 인간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발휘했던 능동적 주체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4.3을 단순한 수동적 피해의 역사가 아닌, 국가라는 거대 폭력에 맞선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투쟁으로 재인식할 때, 비로소 4.3은 관료적 기억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우리 시대를 흔드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주4.3이 겪어온 침묵의 세월은 단순히 물리적인 생명의 박탈에 그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통찰했듯, 전체주의적 지배의 핵심은 인간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드는 과정에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법적 인격의 살해'이고, 둘째는 '도덕적 인격의 살해'이며, 마지막은 '정체성과 개별성의 살해'이다. 4.3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한 반공전체주의는 제주도민들을 향해 이 잔혹한 공식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체성의 살해'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을 말살하여 그들을 교체 가능한 표본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4.3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일 권리, 즉 '발화의 권리'를 빼앗겼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드러내는 대신, 생존을 위해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워야만 했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해야 했던 이 과정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고유한 내면과 서사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였다. 제주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단일한 낙인 아래 개별적인 삶의 궤적을 거세당한 채 공동체적 기억의 공백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진상규명 작업이 이러한 '정체성 살해'의 흔적을 온전히 치유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현재의 법제화된 보상 체계는 주로 물리적 피해와 경제적 손실에 집중한다.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희생자를 분류하고 보상금을 지급하는 행정적 절차는, 역설적으로 아렌트가 우려했던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인식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숫자로 환산된 보상이 정체성 살해라는 근원적 폭력을 덮어버리는 수단이 될 때, 4.3은 다시 한번 관료적 기계 안에서 영혼 없는 기록으로 전유된다.
따라서 4.3 진상규명 운동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법적으로 복권하는 차원을 넘어, 파괴된 '인간의 정체성'을 재건하는 존재론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는 박제된 희생자의 형상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꿈과 욕망을 가졌던 개별적 주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다.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적 삶(bios politikos)'의 회복, 즉 타인과 함께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공론장을 제주에 다시 세우는 것이야말로 반공전체주의가 자행한 정체성 살해에 맞서는 진정한 운동의 시작일 것이다. (3편에서 계속)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국민대학교에서 '로컬리티의 발견과 내부식민지로서의 제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단법인 제주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학평론가로서 제주4.3문학과 오키나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 '욕망의 섬 비통의 언어', '기억이 되지 못한 말들', '김시종, 재일의 중력과 지평의 사상'(공저), '제주, 화산도를 말하다'(공저), '김석범×김시종-4·3항쟁과 평화적 통일독립운동'(공저), '냉전 아시아와 오키나와라는 물음'(공저), '전후 오키나와문학과 동아시아-반폭력의 감수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공저), '비판적 4.3 연구'(공저), '언어전쟁'(공저) 등이 있다. 제주4.3 뮤지컬 '사월-The Great April'의 대본을 쓰기도 했으며 제주4.3 예술운동과 제주 제2공항 반대 투쟁에도 손을 보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