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천재'라 불렸던 안성기..."한심한 놈아" 호통에 밤새 운 사연

당신이 잘 몰랐던 배우 안성기<1>
1979년 연말이었다. 안성기는 서울 중구 서울신문사 인근 성궁다방에 들어갔다. 대학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방 모퉁이에 앉아있는 이장호 감독을 발견했다. 29세에 완성한 장편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으로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스타 감독으로 발돋움한 이였다. ‘어제 내린 비’(1974)와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등을 연출하며 기세를 몰아 가던 이 감독은 1976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이 금지되었다가 규제가 막 풀린 상황이었다. 이 감독은 당시 조감독이었던 배창호(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 감독과 함께 차기작 논의를 하고 있었다.
안성기는 이 감독에게 인사한 후 가방 속에 넣고다니던 시나리오 한 편을 건넸다. 유명 감독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확인하려는 요량이었다. 안성기는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놀던 때부터 시나리오를 썼다.
배 감독은 안성기가 자리를 떠난 후 이 감독에게 안성기 캐스팅을 강하게 건의했다. 이 감독은 복귀작으로 ‘바람불어 좋은 날’을 준비 중이었다. 최일남(1932~2023) 작가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1979)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세 청년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그리려 한 사실주의 작품이었다.

이 감독은 주인공인 중국집 배달원 덕배 역할을 실제 사시(눈동자의 방향이 서로 다른 상태)인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다. 기성배우 중에서 찾지 못하자 신문에 오디션 광고를 낸 후 연기를 해보지 않은 사시 청년을 주연배우로 뽑았다. 이 감독은 청년을 자기 집에서 먹고 재우며 연기를 지도했다. 하지만 연기 실력이 금세 나아질리 없었다. 이 감독은 영등포동 한 안과에서 사시 교정 수술을 해준 후 청년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덕배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지 고민하고 있던 중에 안성기와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배 감독은 한때 배우가 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역배우 안성기를 동경의 시선으로 볼 정도로 팬이었다. 안성기가 성년이 된 후 출연한 ‘야시’(1979)를 보고 그의 개성 있는 외모와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도 했다. 배 감독의 건의에 이 감독은 마음을 움직였다. 이 감독은 안성기에게 ‘바람불어 좋은 날’ 출연을 제안했다. ‘길거리 캐스팅’ 아닌 ‘다방 캐스팅’이었던 셈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안성기 연기인생에 있어 큰 변곡점을 이룬 영화로 훗날 평가 받지만 연기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어려서 ‘연기 천재소년’이라 불렸던 안성기는 이 영화를 찍으며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른 못지않던 스타 아역배우

안성기는 7세(공식적으로는 1952년생이나 실제로는 1950년생) 때 연기를 시작했다. ’황혼열차’(1957)를 통해서였다. ‘황혼열차’는 김기영(1919~1998) 감독의 영화였다. 안성기의 아버지 안화영(1925~2019)씨는 서울대 연극반 선배였던 김 감독과 친밀한 사이였다. 김 감독은 동성고 체육교사였던 안씨를 영화제작 일로 이끌기도 했다. 김 감독이 ‘황혼열차’ 속 문임(도금봉)의 아들을 연기할 아역배우를 찾는다고 했더니 안씨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안씨는 ‘황혼열차’에서 주인공 혜련(김지미)의 오빠 역할을 맡았다. 김 감독은 “눈에 장난기가 가득해서 이놈 잘할 수 있겠다 싶어서” 안성기를 ‘황혼열차’에 출연시켰다. ‘황혼열차’는 배우 김지미(1940~2025)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안성기가 성인이 된 후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김지미는 “데뷔 동기끼리 왜 그래”라며 웃었다고 한다.
‘황혼열차’는 전쟁 고아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였다. 김지미의 미모가 소문을 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소년 안성기의 연기는 영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다음해인 1958년에 영화 6편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안성기는 김 감독의 영화 ‘십대의 반항’(1959)으로 국내외에서 상을 받으며 더욱 주목받았다. 소년원을 탈출한 불량아 근선을 연기해 1960년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대종상 전신) 소년연기상,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각각 수상했다. 안성기는 김 감독의 스릴러 ‘하녀’(1960)에도 출연했고 이후 성인 스타들처럼 영화 서너 편에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아역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언제나 아역스타로 빛날 수는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조흔파(1918~1980) 작가의 동명 청춘소설을 영화화한 ‘얄개전’(1965)에서 주연을 맡아 인기몰이를 했으나 아역배우 안성기의 전성기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고교생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안성기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젊은 느티나무’(1968)를 끝으로 아역배우 생활을 마쳤다. 11년 동안 활동하며 출연한 영화는 71편이었다.
안성기는 평범한 청소년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성고에서 학업에 몰두했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싶었으나 원하는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재수를 해 1970년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했다. 베트남과 교류가 많았던 시절이라 미래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1976년 중위로 군복무를 마친 후 나온 세상은 급변해 있었다.
“준비를 그 정도 밖에 못 해?”… 감독의 불호령

베트남은 1976년 통일과 함께 공산화됐다. 베트남어를 쓰려고 해도 쓸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안성기는 다른 ROTC 출신들과 달리 취업 길이 사실상 막혔다. 대기업에 입사 원서를 내면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는 했다. 마냥 놀 수 없다는 생각에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으나 한 학기만에 그만뒀다. 안성기는 주한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쓰며 2년 가량을 백수로 지냈다. 인생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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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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