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무쌍’ 러시아군…“암환자도 전장에” “자살돌격 면하려면 돈 내라”

천호성 기자 2026. 1. 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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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인권위에 접수된 민원 6천여건
뉴욕타임스, 민원인 240명 인터뷰
“처형한 주검 폭파해 살해증거 은폐”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의 러시아군. 타스 연합뉴스

18살의 러시아군 병사 사이드 무르타잘리예프는 지난해 3월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휴대전화로 영상편지를 찍어 어머니 레일라 나흐슈노바에게 보냈다. 영상에는 그가 ‘자살돌격을 면하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지휘관 명령을 받고, 부대원들에게서 1만5000달러어치 뇌물을 모았다는 증언이 담겼다.

그러나 지휘관은 정작 무르타잘리예프를 자살돌격대에 넣어버렸다. 지휘관이 뇌물을 받은 사실을 숨기려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앞으로 하루 이틀 안에 연락이 없으면 이 영상을 공개해주세요.” 영상 속 무르타잘리예프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받은 마지막 연락이었다.

이는 러시아 인권위원회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나간 러시아군 병사와 친지들로부터 접수한 수천건의 민원 내용 중 하나다. 민원에는 러시아군 지휘관들이 뇌물을 갈취하고 병사를 학대하며, 다리가 잘리거나 말기 암에 걸린 부상병도 전장에 되돌려보낸다는 고발이 담겼다.

이런 내용은 러시아 인권위가 지난해 4∼9월 접수한 민원 6000여건을 실수로 누리집에 열람할 수 있도록 올려놓으며 외부에 알려졌다. 유출된 민원 중 1500여건이 군 관련이었다. 이를 러시아 독립매체 ‘에코’가 수집해 미국 뉴욕타임스에 제보했다.

뉴욕타임스는 민원인 240명을 접촉하고 수십명을 인터뷰해,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러시아의 전쟁 기계는 어떻게 자기 병사를 학대하고 착취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했다.

상당수 민원은 병사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가혹행위를 고발했다. 부상, 질병 등으로 정상적인 복무가 어려운 병사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채 최전선에 돌려보내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인권위에 민원한 어머니 류보프의 아들은 전투 중 다리를 다쳐 후방에서 치료를 기다리다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들에게 붙들려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는 2023년에도 뇌진탕을 겪었지만 소속 부대장은 “여기서는 모두 뇌진탕 하나쯤은 있다. 치료는 집에서 하라”며 치료해주지 않았다. 류보프는 뉴욕타임스에 현대의 러시아군이 이 정도의 “무법 상태”일 줄 상상도 못 했다고 분노했다.

골절, 4기 암, 간질, 시력·청력 손실, 두부 손상, 조현병, 뇌졸중 후유증 같은 치명적인 건강 상태의 병사들이 전선으로 실려 간다는 민원도 이어졌다. 한 러시아군 병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환자들이 의료시설에서 나와 전투에 복귀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간경화로 얼마나 살지 모르는 사람이나 암 환자를 왜 다시 보내나? 집에서 죽을 기회라도 줘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다른 병사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들도 전선으로 보내진다. 그 모든 걸 내 눈으로 봤다”고 했다. 인권위에 접수된 한 민원은 “나는 파편이 중추신경계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머리가 계속 아프고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왜 다시 임무에 보내려는 건가?”라고 호소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홀로 진격하다 우크라이나군 드론의 표적이 된 러시아군 병사. 우크라이나 군사 분석 그룹 ‘프론텔리전스 인사이트’

지휘관들이 병사에게 사망 가능성이 매우 높은 돌격을 강요하고, 거부하면 가혹 행위를 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러시아군은 병사들이 우크라이나군 드론에 들키지 않고 최대한 전선 깊숙이 잠입하도록, 장갑차 등의 엄호 없는 ‘나홀로 돌격’을 늘리는 추세다. 병력 열세인 우크라이나군의 후방을 교란하려는 의도이지만, 돌격대가 드론·지뢰에 무방비여서 러시아군의 인명피해 역시 막대하다.

지난해 8월27일 옥사나 크라스노바는 아들 일리야 고르코프가 음식과 물도 없이, 화장실도 못 간 채 나흘간 나무에 묶여있는 영상을 인권위에 신고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크레민나 인근 마을을 러시아군이 점령한 것처럼 ‘러시아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라’는 임무를 거부했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 고르코프가 소매에 숨겨둔 휴대전화로 자기 모습을 촬영해 어머니에게 보내면서 이 사실이 알려졌다.

고르코프는 러시아 보안기관에 연줄이 있는 친척 덕분에 풀려난 뒤, 변호사를 선임해 부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복귀는 곧 “사형선고에 스스로 서명하는 것과 같다”고 전했다.

일부 지휘관들은 병사를 사망률이 높은 위험한 부대에 보내겠다는 등의 협박으로 뇌물을 뜯는다. 병사 미하일은 뉴욕타임스에 지휘관들이 위험한 돌격에서 빼주겠다며 뇌물을 받고도, 돈만 챙긴 채 병사는 임무에 그대로 보냈다고 증언했다.

고르코프는 “사람을 나무에 묶고 돈을 갈취하는 짐승 같은 지휘관들이 있다”며 “이들은 자기가 처벌받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돌격시키고 나면) 그것이 ‘편도 여행’(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임무)이란 걸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에선 지휘관이 입막음이나 처벌 등을 위해 흔적 없이 죽게 만드는 일을 두고 ‘영(0)으로 만들기’(제로잉 아웃)라는 은어까지 생겼다. 이 매체가 확인한 민원 중 44건 이상에 이 단어가 등장하며, 100건 넘는 민원엔 ‘지휘관이 병사를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는 고발이 담겼다.

러시아군 제36994부대에선 병사의 어머니·부인 등 10명이 공동 민원으로 지휘관들을 신고했다. 이들은 부대장 등이 병사 300명 이상을 살해하고, 이들의 휴대전화로 은행 계좌에 접속해 돈을 빼갔다고 주장했다. 민원인들은 “살해 증거 은폐를 위해, 처형된 병사들 시신은 버려진 곳에 묻히거나 대전차 지뢰로 폭파돼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민원 문서에 적었다.

어머니에게 영상편지를 보낸 무르타잘리예프 역시 이 부대 소속이었다. 어머니 나흐슈노바는 아들을 죽게 한 지휘관 두 명을 군 당국에 고발했지만, ‘시신이 회수되지 않아 살인 혐의로 수사를 개시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르타잘리예프는 공식적으로 ‘작전 중 실종자’로 분류돼 있다.

나흐슈노바는 뉴욕타임스에 “당국은 시신이 폭파됐을 가능성이 높고 남은 조각은 야생동물이 먹었을 거라고 했다. 시신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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