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남도, 그 시리도록 푸른 맛과 이야기의 성찬...전남 보성 & 장흥 감성 여행

벌교 꼬막은 단순한 조개가 아니다. 그것은 여자만(汝自灣)의 차지고 고운 펄이 빚어낸 예술품이다. 꼬막의 세계에도 엄연한 계급이 있고 서열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반찬으로 접하는, 껍질에 털이 보송하고 골이 얕은 것은 ‘새꼬막’이다. 배를 타고 나가 그물로 걷어 올린다. 껍질 표면에 미세한 털이 있어 다소 투박한 외형을 지녔지만, 저렴한 가격 덕분에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다.

참꼬막은 껍질이 두껍고 골이 선명하며 육질이 훨씬 쫄깃하다. 꼬막 눈(숨구멍)이 갯벌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 그렇게 4년을 기다려야 비로소 우리 식탁에 오를 자격을 갖춘다. 그래서일까, 참꼬막의 가격은 새꼬막의 다섯 배를 호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삶는 기술이다. 꼬막은 너무 오래 삶으면 질겨지고, 덜 삶으면 비리다. 물이 끓어오를 때 꼬막을 넣고 한쪽 방향으로 저어주다가, 거품이 일며 입을 살짝 벌리려 할 때 건져내야 한다. 껍질 뒤쪽을 도구로 ‘탁’ 하고 까면, 탱글탱글한 살점과 함께 검붉은 핏물이 고여 있다. 남도 사람들은 이를 ‘초콜릿 물’이라 부른다. 입안에 넣으면 짭조름한 바다 향과 함께 쫄깃한 식감이 혀를 감는다. 별다른 양념 없이도 꽉 찬 감칠맛, 이것이 바로 겨울 벌교의 맛이다.


벌교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실제 무대다. 배를 채우고 거리로 나서면 소설 속 문장들이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소설의 첫 문장이 시작되는 ‘태백산맥 문학거리’에서 여행자들은 문학 산책을 시작한다. 태백산맥 문학거리는 1940~50년대로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보성여관’이다. 작중에서 빨치산 토벌대장 임만수가 머물렀던 ‘남도여관’의 실제 모델이다.


벌교에서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율포솔밭해변이 나타난다. 여름철에는 피서객으로 붐비지만, 겨울 해변은 산책하는 이들만의 조용한 낙원이 된다.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현대적인 조형물들과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특히 일몰 시간대, 섬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경험은 보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힌다.

여정의 피로는 보성 문덕면의 한옥 ‘목임당’에서 푼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고택이다. 호텔의 매끄러운 편리함 대신, 조금은 투박하지만 깊이 있는 안락함이 이곳에 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끼익’ 하는 나무 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잘 가꿔진 마당과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시골 풍경이 마음의 빗장을 푼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은 곡선의 미학을 보여준다. 나무가 가진 본연의 휨을 억지로 펴지 않고 집의 뼈대로 삼은 조상들의 지혜다. 방바닥은 뜨끈하다. 얇은 이불 하나 깔고 누우면 등허리로 전해지는 열기가 온몸의 긴장을 녹여낸다. 주방에는 주인장의 취향이 묻어나는 투박한 질그릇들이 놓여 있어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초록빛 바다를 끓여내다, 장흥 매생이
보성에서 차를 몰아 장흥으로 넘어간다. 장흥의 바다는 보성과는 또 다른 색을 띤다. 득량만 안쪽, 장흥 내전마을 앞바다는 겨울이면 검푸른 빛 대신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다. 바로 매생이 때문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매생이는 천덕꾸러기였다. 김 양식장에 달라붙어 김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바다의 잡초’ 취급을 받았다. 김발에 매생이가 붙으면 어민들은 “망했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 해역에서만 자라는 매생이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이제는 김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겨울 바다의 귀족이 되었다.

장흥 토박이들은 매생이국의 농도를 젓가락으로 가늠한다. 숟가락이 아닌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걸쭉해야 제대로 된 매생이국이라는 것이다. 굴을 넣고 끓여낸 뜨끈한 국물 한 모금이면, 안도현 시인의 말마따나 ‘바닷가의 바람과 물결 소리’가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장흥에 왔다면 반드시 맛봐야 할 미식의 정점이 있다. 바로 ‘장흥 삼합’이다. 홍어를 곁들인 전라도 삼합과는 결이 다르다. 장흥의 기름진 땅에서 자란 한우, 득량만 갯벌이 키운 키조개 관자, 그리고 숲의 정기를 머금은 표고버섯이 그 주인공이다. 이 조합은 그야말로 완벽한 맛의 설계다.
불판 위에서 한우가 지글거리며 육즙을 뿜어내면, 그 기름을 표고버섯이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그 옆에서 살짝 익힌 관자는 부드러운 식감과 바다의 감칠맛을 더한다. 소고기의 고소함, 버섯의 쫄깃함과 향, 관자의 달큰함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산과 들, 바다가 한 입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정남진 장흥 토요시장이나 읍내 식당 어디를 가도 이 환상적인 삼합을 맛볼 수 있다.


장흥은 문학의 토양이 유난히 비옥한 땅이다. 벌교에 주먹이 있었다면, 장흥 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작가들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다. 특히 소설가 이청준의 흔적은 장흥 곳곳에 서려 있다. 회진면 진목마을은 그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 역시 장흥이 낳은 문인이다. 그는 여전히 고향 바닷가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에서 글을 쓴다. 안양면 율산마을 앞바다에는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바다를 향해 난 길을 따라 그의 시비(詩碑)들이 서 있다. 겨울 바다의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시를 읽다 보면, 아버지 한승원에서 딸 한강으로 이어지는 문학적 유전자가 이 바다 어디쯤에서 기원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여정의 마지막은 장흥의 깊은 숲이다. 가지산 자락에 안긴 보림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인도의 가지산, 중국의 가지산과 함께 ‘동양의 3보림(불법을 전하는 숲속 도량)’이라 불릴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고즈넉한 경내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진짜 보물은 절 뒤편에 숨어 있다. 바로 비자나무 숲이다. 수령 300년이 넘는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울창한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비자나무는 겨울에도 생기를 잃지 않는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12호(26.01.0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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