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3도에도 뉴요커 4만명 “맘다니 취임 축하” 도로서 파티[뉴욕의 순간]

한국이 새해 둘째 날을 맞은 오늘, 미국 뉴욕은 아직 새해 첫날인 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해의 1월 1일과 다른 아주 역사적인 이벤트가 있었어요. 바로 뉴욕의 112대 시장인 조란 맘다니의 취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맘다니 시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의 역사를 새로 쓴 시장입니다. 일단 처음으로 인도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시장이고, 아프리카 대륙인 우간다에서 7살 때 이민 온 이민자 출신 시장이기도 합니다. 또 최초의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시장이고, 정치적으로는 본인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한다는 면에서 여러 가지로 ‘최초’ 타이틀이 많이 붙은 인물입니다.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에서 민주사회주의자 성향의 시장이 탄생했다는 게 많은 화제 내지는 논란이 됐죠. 아, 34세의 젊은 나이 역시 뜨거운 화제였습니다.


그런 맘다니 시장은 취임식도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은 특별한 컨셉으로 열겠다고 예고했는데 바로 ‘취임 축하 블록 파티’라는 것이었습니다. 격자무늬 계획도시인 맨해튼은 도로와 도로 사이를 블록으로 표현하는데, 브로드웨이 대로의 7개 블록에 걸친 도로를 막아놓고 무려 4만 명의 시민들이 함께 취임식을 ‘단관(단체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것이었죠.
뉴욕시청 앞마당에서 열리는 공식 취임식과 동시에 바로 그 옆 도로에 4만 명의 시민들이 모이는 행사를 하겠다고 하니 그간 뉴욕은 보안 준비로 난리였습니다. 뉴스를 통해 여러 사건을 접하셨겠지만 요즘 미국도 정치적 갈등이 심각하다보니, 혹시라도 1월 1일 열리는 뉴욕시장 취임식이 범죄나 테러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컸죠. 그래도 이 역사에 기록될 만한 순간을 전하기 위해 취임식 현장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이날 날씨는 정말, 엄청, 굉장히 추웠습니다. 숫자로는 체감온도 영하 13도였는데 맨해튼은 섬이라 겨울 돌풍과 강풍이 워낙 심하다보니 실제로 느끼는 체온은 그보다 훨씬 더 낮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에 도착하자,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줄을 선 인파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습니다.

시청에서 열리는 본 행사 입장 줄도 길었지만, 바로 옆 블록에서 열리는 단관 파티 입장 줄은 더 길었는데, 정말로 태어나서 본 줄 중에 가장 긴 줄이었습니다. 길이를 계산하니 약 1km정도 되는 줄이었는데, 이토록 추운 날씨에 집에서도 TV로 볼 수 있는 취임식을 시민들과 함께 (직관도 아니고 전광판으로) 보러 나왔다니…. 어떤 콘서트장에서나 행사장에서도 보지 못한 열기다 싶었습니다. (물론 2002년 월드컵 때를 생각하면 아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이날 줄을 선 이들을 취재하다가 만난 뜻밖의 신스틸러도 있었습니다. 바로 맘다니 시장과 함께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공화당 후보 커티스 슬리와였습니다. 슬리와 전 후보는 항상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베레모를 쓰고 다니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베레모를 쓴 채 홀로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입장 대기줄에 서 있었습니다.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깜짝 놀라 다가가 주먹인사를 하고 기념촬영 부탁을 하자 흔쾌히 응해주기도 했고요.

사실 전 이날 취임식 행사에서 그 어떤 것보다 이 장면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공화당 뉴욕시장 후보였는데, 자신이 진 선거에서 상대편의 취임식 단관 파티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요. 우리로 치면 서울시장 후보였던 송영길, 오세훈, 박영선, 안철수 이런 분들이 서로가 승리하거나 졌을 때 상대편의 취임 축하 시민 파티에 갈려고 몇시간 씩 줄을 서있다는 건데, 솔직히 잘 상상이 안되는 장면이잖아요. 더더욱이 ‘무대 위에 내 자리 하나 만들어줘’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섞여 영하 13도의 날씨에 2시간 넘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좀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이날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단관 파티 입장까지 최소 2시간에서 4시간까지 기다렸다는 응답이 나왔습니다. 너무 추운데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하다 보니 추위를 이기기 위해 일행끼리 단체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어요.
맨해튼에 거주한다는 30대 여성 직장인 앨리슨 씨에게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이유를 물으니 진심 어린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이 분은 강추위에 온몸과 턱을 덜덜 떨면서도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그는 “오늘 취임식은 단순한 시장 취임식이 아니고 (부를 독차지한) 1%에 대한 99% 시민들의 목소리를 말하는 자리”라며 “높은 물가와 집값 때문에 더 이상 뉴욕은 평범한 시민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됐고, 맘다니가 이 문제를 꼭 바꿔주길 지지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앨리슨 씨는 화이트칼라 직장인으로 보였는데 “집 앞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이들이나 뉴욕의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시민들을 볼 때 슬퍼진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루 종일 일해도 도저히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 뉴욕은 감당할 수 없는 곳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뉴욕 뿐 아니라 미국 선거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감당할 수 있는(affordable) ◯◯’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날 취임식과 취임식 단관 파티 행사는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막상 행사가 시작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펼쳐졌어요. 블록마다 초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시민들을 맞을 준비를 마치고, 대형 스피커에서는 ‘New York State of Mind’ 음악이 흘러나오며 뉴요커들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 앞에 관객들이 없었던 겁니다.

이날 시민들은 블록에 입장하기 전에 테러 등을 우려해 굉장히 엄격한 소지품 및 탐지기 검사를 거쳐야 했어요. 반입 금지 품목 리스트만 20개가 넘어갈 정도였습니다. 보안을 이유로 블록파티 출입구 위치도 단 한 곳 뿐이었고요. 그러다보니 검사 속도가 인파와 행사 시작 시간을 따라잡지 못했던 겁니다. 맘다니 시장 취임식은 당초 예정됐던 1시보다 30분 늦은 1시 30분에 시작됐는데, 그때까지도 블록파티 거리는 반도 채워지지 못한 썰렁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거리 입구 밖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대기 중이었지만요. 보고 있는 제가 다 안타깝더라고요.

보는 이가 거의 없는 거대한 전광판 속에서 취임식 축사를 맡은 (맘다니 시장과 같은 민주사회주의 계열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민주당·뉴욕)은 “뉴욕 시민들은 두려움 대신 용기를 선택했다”며 “우리는 소수의 부를 위한 전리품보다 다수의 번영을 선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취임 기도는 뉴욕 이슬람 센터 소장인 칼리드 라티프 이맘이 맡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 때도 그렇고) 정치인들이 성경에 손을 얻고 취임 선서를 하거나 종교 지도자가 축복 기도를 해주는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뉴욕 역사상 이슬람 지도자가 취임 기도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맘다니 시장은 이날 성경이 아닌 자신의 할머니가 쓰던 이슬람 경전 쿠란에 왼손을 올리고 취임 선서를 했는데 이 역시 뉴욕시 4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날 맘다니 시장은 “나는 민주사회주의자로 당선됐고, 민주사회주의자로 일할 것”이라며 “급진적이라고 여겨질까봐 두려워 원칙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또 “이제 뉴욕시청은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행정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항상 성공하진 못하더라도 시도할 용기가 부족했다는 비난은 결코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강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날 취임식에서는 이민자의 도시로서 뉴욕에 대한 강조와 다양성에 대한 지지도 이어졌습니다. 맘다니 시장은 “나 같은 무슬림 아이가 매주 일요일 (유태인 음식인) 베이글과 훈제 연어를 먹으며 자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냐”며 뉴욕의 다양성과 개방성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인 그레나다 출신으로, 어릴 적 이민자 자녀로서의 어려움과 장애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 윌리엄스 옹호관은 이날 뉴요커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주변의 이민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자”고 호소하는 연설로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새해에 뉴욕에서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림 치 불법 이민자 단속이 격렬해질 수 있다는 우려 속에 나온 발언이라 더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따라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만큼, (우리가 힘을 합하면 좋은 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아무도 서로의 손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날 취임식에서 가장 큰 연호가 나온 건 ‘부자 증세(Tax the rich)’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맘다니 시장은 “우린 가장 부유한 소수에게 세금을 부과해 다수를 위한 (무상)보육을 제공할 것”이라며 “임대료 안정화 주택 역시 임대료를 동결할 것이므로 임대료 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시민들은 “부자 증세”를 연호하며 환호했고요. (몇몇 시민들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더라고요.)
평소 맘다니 시장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밝혀 온 민주사회주의계의 대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무소속·버몬트)은 이날 취임 선서를 주관하며 한 연설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 급진적이라고 하지만 진짜 급진적인 것은 극소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다수에게 삶의 기본적 필수품조차 박탈하는 체제”라고 말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맘다니 시장의 부자 증세가 본격화 되면 뉴욕시 세금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고 있는 초부유층들이 뉴욕시를 아예 떠나버릴 것이란 우려도 나오는데 실제로 어찌될 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새해 첫날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역사적인 112대 뉴욕 시장의 취임 행사가 끝났습니다. 분명 오늘은 축제였습니다. 맘다니 시장은 4년 뒤 임기가 끝날 때에도 축제를 열 수 있을까요? 850만 뉴요커들과 세계의 눈이 그의 다음 행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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