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도서관’에서 행복한 시간 도둑을 만나다 …인자 산문집


“오십대에 뒤늦게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중년의 글쓰기가 너무도 즐겁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 도둑처럼, 내 하루를 몽땅 훔쳐 달아난다. 도서관이 나의 일터가 된 것도 감사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누군가의 빛나는 문장을 잠시 엿볼 수 있으니. 책 제목만 실컷 보는 것마저 축복이다. 누군가 밤새워 고민했을 그 제목들이, 내게는 전혀 다른 영감으로 떠오르곤 하니까.”
산문집 ‘삶은 도서관’(싱긋 발행)의 에필로그. 도서관 공무직으로 일하는 중년의 저자가 ‘행복’ ‘감사’ ‘축복’을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그의 말에 담긴 진정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저자 인자는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광고 홍보인으로 일하며 두 딸의 엄마로 치열한 일상을 살아왔다. 그 때문에 시 쓰기를 잠시 쉬는 ‘쉬인’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공공기관에 입사해 도서관 노동자로 살며 책으로 가득한 서가 안쪽에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9회 경기히든작가로 선정되며, 에세이 작가로 세상과 새롭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책은 도서관에서 마주한 웃음, 삶, 노동, 추억, 그리고 나이듦을 다섯 개의 서가에 나눠 담았다. 작가가 프롤로그에 쓴 제목처럼 ‘프라이드 에이징, 깊어져가는 삶을 위하여’ 나날의 일상을 넉넉하게 품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
첫번째 글 <‘젖가락 살인’은 우리 도 서관에 없습니다>는 이 책이 독자를 익살의 세계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예고한다. 도서관 이용자가 찾는 ‘젓가락 달인’을 ‘젓가락 살인’으로 잘못 듣고, 이용자의 성을 ‘곽’에서 ‘강’으로 오해하며 벌어지는 소동들이 웃음을 안긴다. CCTV 사각지대를 이용해 몰래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 혼자 보겠다며 만화책을 엉뚱한 서가에 숨기는 아이들, 글자를 모름에도 책을 거꾸로 들고 읽던 할머니들을 작가와 함께 만나며 슬몃 웃게 된다.
도서관 서가엔 그런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1년 넘게 28번 사물함을 쓰던 한 취준생의 뒷모습처럼 안쓰러운 삶의 무게가 자리한다. 시인,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며 매일 도서관에 나오는 노인 문청들. 저자는 시 쓰는 어르신이 사온 팔순 자축 케이크를 도서관 직원들과 나눠 먹은 후 엽서에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어르신의 시 쓰는 낮을 응원합니다.”
저자의 시선은 ‘서가의 안쪽’으로 들어가 도서관 노동의 현실을 전하며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길어 올린다. 책의 뒷부분 ‘추억의 서가’, ‘꿈의 서가’는 조금 남루하게 여겨졌던 나날의 일상이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윤고은 작가는 이 산문집을 읽은 후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도서관의 네모반듯한 질서를 헝클어뜨리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일, 오배열의 아름다움을 간파해내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고요해야만 할 것 같은 이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소동이 벌어지는지, 도서관 노동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 속에서 덩달아 즐거워졌다. 어떤 책은 전혀 몰랐던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 된다. 그 책이 아니면 영영 모를 이야기와 발굴되지 않을 말들을 품고 있다. 세상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도 우리가 여전히 누군가의 첫 책을 기다리는 이유다. ‘삶은 도서관’은 도서관에 찾아가는 마음이 무엇이고 거기서 기다리는 마음은 또 무엇인지를 헤아리게 만든다. 이 마음과 저 마음 사이를 오가며 산책하게 한다.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그 일상적인 행위에 이토록 놀라운 ‘인생 서사’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장강명 작가는 나이 들며 깊어진다는 것에 주목했다.
“프롤로그를 읽을 때 한 번, 책을 읽다가 몇 번, 그리고 책장을 덮고서 다시 한번, 인자 작가가 이름 붙인 ‘프라이드 에이징’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멋진 개념과 용어를 만들어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이들며 더 깊은 삶을 누리고, 더 깊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모든 분들께 추천한다. 삶이 깊어지는 과정에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다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일, 가족, 사랑, 시선, 예의, 이웃, 예술, 작은 기쁨들, 그리고 아마도 좋은 동네와 좋은 도서관들 말이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말장난을 하는 ‘아자씨 유머’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어찌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지 유쾌한 마음으로 미소 짓게 한다는 것이다. 그 뿐 만 아니라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한다. 저자가 맨 마지막에 쓴 ‘어느 인자(仁慈)한 밤에’ 함께 있는 것처럼.
김지은 기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서울시민 57% “오세훈 못해”…李견제 위해 “야당돼야” 47%·“여당돼야” 45%-엠브레인
- “좌석 업그레이드, 왜 내 돈으로”… 또 터진 이혜훈 ‘갑질’ 의혹
- 새해 첫날 참사…스위스 유명 휴양지 폭발 사고로 100여명 사상
- 현역병 피하려 하루 줄넘기 천개 ‘성실한’ 20대 최후
- 친구 내연녀에 성관계 요구했다가 피살된 20대 印 남성
- [속보]다급한 민주당, 강선우 탈당하자마자 제명…김병기, 징계심판 결정
- ‘불륜 의혹’ 상간남, 숙행 감쌌다 “‘엘베 키스’ 때 동거 안 해”
- 부산시장? 전재수 39% 박형준 30% 통일교 논란에도 與굳건-케이스탯리서치
- 20대 남성한테도 구애받은 50대 여성의 근육질 몸매 화제
- 홍준표 “이혜훈, 비례대표하고 싶다며 찾아왔었다…정치 이전 인성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