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아리랑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비행기는 늘 밤을 가로지른다. 기체가 구름을 뚫고 중력과 타협하는 동안, 지상의 세계와 떨어진 거리만큼 어둠이 짙어간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지구의 어두운 뒤편을 빠져나오면 새하얀 밤, 백야가 계속된다. 여객기는 따라오는 지평선보다 몇 걸음 앞서고, 태양은 기울지 못한 채 멀뚱거린다.
바깥의 밤은 안개처럼 비행기 안으로 스며든다. 창문의 눈꺼풀을 내리고 실내등이 꺼지면, 빛을 수혈받지 못한 승객들은 겨울잠에 빠진다. 제트 엔진이 뿜어내는 숨결은 영하의 대기와 만나 반짝이는 비행운을 그린다. 창공은 겨울에 사로잡혀, 대륙을 오가는 썰매 자국으로 가득하다. 가끔 부스러진 꿈들이 기내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내 연인을 되찾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어요. 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도와주세요, 이 글을 읽는 분, 날 위해 기도해 줘요, 착륙하기 전에 죽을 것 같네요.
- 3월 5일, 하와이로 가는 길.
프랑스 파리로 가는 여객기 33B 좌석, 남자는 3월 5일 날짜의 영어 英語 메모를 발견한다. 싱가포르항공 기내지 실버 크리스의 뒷부분, 항공사 운항 지도의 하늘색 바다에 볼펜으로 휘갈겨 쓴 조난 신호. 병 속에 담긴 편지. 대양 건너 누군가 읽어주길 기대하며 파도를 향해 던진 간절한 소원.
누군가 글 밑에 말풍선을 달고, 붉은색 답글을 써넣었다.
당신 둘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길 빌게요.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 3월 7일, 두바이에서
비행기는 날아다니는 감옥이다. 매번 출발지와 행선지가 바뀌는 임시 구치소. 형기는 짧지만 옴짝달싹하기 힘든 독방. 교도소 수감자들은 감방 바닥과 벽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출옥의 희망을 새겨 넣는다. 여기서는 영치금으로 넣어준 책, 기내지가 가끔 그런 역할을 한다.
메모를 남긴 사람도, 댓글을 단 사람도 다시는 이 기내지를 만나지 못할 걸 너무나 잘 안다. 그 소원에 GPS 좌표나 트랙백 주소가 달린 것도 아니기에, 반응이 돌아올 걸 기대하지 않는다. 기내지는 소원을 짊어진 채 지구 수십 바퀴를 묵묵히 돈다. 뚜껑이 열려 해저로 가라앉는 병 속 편지처럼.
이 기내지를 기념으로 가지고 내릴까, 아니면 댓글이 더 달리도록 그대로 둘까? 남자는 고민하면서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한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유럽은 14일이 15일로 바뀌었다. 남은 보름 동안, 이야기는 계속돼야 한다. 남자는 아스라하게 떠 있는 알파벳의 뗏목에 몇 줄 덧붙인다. 소설 [야간비행]의 한 문장과 자신의 바람을.
일단 선택하고 나면, 우리는 그 우연에 만족하고 사랑하게 된다.
-생텍쥐페리
당신의 선택이 사랑의 완성으로 이어지길.
남자는 메모가 담긴 기내지 대신 옆좌석의 깨끗한 기내지를 꺼내 챙긴다.
남자는 항공사 기내지를 모은다. 대기권을 가르며 완수한 하늘 여행의 증표.
탑승권은 여권의 출입국 도장처럼, 날짜와 목적지만 적힌 표정 없는 증명서이다. 반면, 기내지는 항공사가 취항하는 국가와 이착륙한 도시의 문화적 이력서, 그가 여행한 사회의 모습이 살아 있는 얼굴이다.
좌석에 앉아 안전띠를 맨 뒤 남자는 곧바로 앞주머니에 꽂힌 기내지를 꺼낸다. 일요일 교회 예배가 시작되면 성경과 찬송가를 열 듯이 그는 얇고 날씬한 잡지를 펴든다. 그의 자리는 거룩한 의식을 치루는 제단으로 변하고, 옆에 누가 앉든 다른 이들은 동참하는 신도가 된다. 그는 식을 집전하는 사제로서 앞서 이 항로를 개척하고 누빈 수많은 조종사와 여행객을 기리고, 자신이 밟을 눈앞의 여정을 미리 축복하며 안전한 운항을 바란다. 다른 승객들이 수다를 떨거나 음악을 듣거나 곧바로 잠으로 빠져들어도 식은 진행된다. 기내지를 복음서처럼 펴 든 한 사람만 있으면 이 의식은 유효하다.
운 좋으면 그가 목적지로 삼은 도시의 기사가 지면에 얼굴을 내민다. 다음 여행의 후보지로 올려놓고 싶은 멋진 곳이 소개되기도 한다. 여행 국가의 국내선을 타면 의식은 더 다채로워진다. 지역 군소 항공사의 기내지에 독특한 풍속과 문화가 넘쳐흐른다. 그는 이륙과 착륙의 두 끝점 사이의 여정을, 기내지의 문장과 사진을 길잡이 삼아 즐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여행 가방에는 기내지 대여섯 권이 신탁이 담긴 소중한 하사품처럼 자리를 차지한다.
이 수집의 최종 목표는 2010년대 후반까지 운항 중인 전 세계 모든 항공사의 기내지를 회사별로 모아, 책꽂이를 채우는 것이다. 남자는 한 항공사가 발행한 기내지를 첫 호부터 전체를 모으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건 너무 무모하고 과대망상에 가까운 일이다. 남자에게는 나름의 수집 원칙이 있다. 그가 탑승한 개별 시점, 개별 항로 여행에서 만난 기내지만이 그의 수집 대상이다. 2010년, IATA(국제항공운송협회)에 등록한 전 세계 수백 개의 항공사 중 기내지를 발행하는 곳은 150여 사 정도다. 그들이 운행하는 항로를 전부 다녀볼 수는 없다.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지 않는다. 한 항공사의 대표 항로를 선택하고, 그를 중심으로 서너 곳의 운항 도시를 다니는 게 그의 수집 전략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남자가 90년대 후반, 동남아시아의 싸고 품질 좋은 커피콩 수입차 인도차이나반도를 방문했을 때였다. 베트남 항공을 타고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착, 커피 농장주와 도매업자를 만난 뒤, 남자는 하노이에서 라오스의 국영항공사 라오 에어를 타고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까지 갔다. 거기서 이틀 묵고 라오 에어의 30인 승 프로펠러기 국내선을 타고 커피 플랜테이션이 있는 볼라벤고원과 가까운 ‘팍세’, 옛 라오스 왕국의 수도 루앙 프라방을 거쳐 다시 하노이로 빠져나왔다. 그 출장에서 남자는 네 가지 서로 다른 항로를 경험했고, 라오 에어가 발행하는 아주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기내지를 얻었다. 라오스 문자와 영어를 혼용해서 명승지와 특산품을 소개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사진과 인쇄 품질은 한국의 1970년대 수준이지만 그에겐 아주 귀한 수집품이었다. 남자는 명승지 ‘스탬프 투어’ 도장을 찍는 것처럼, 기내지 표지 뒷면에 탑승권 넉 장을 붙였다.
남자는 서울의 사무실 근처 작은 여행사에 비자, 항공권 업무를 맡겼다. 여행사의 항공권 예약 담당자에게 남자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발권 의뢰는 십중팔구, 여행자의 상식을 깨버렸다. 보통의 여행객은 저가격 우선, 환승 최단 시간, 마일리지 최대 적립 등을 우선 조건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 고객은 정반대였다. 마치 남는 게 시간과 돈이라는 듯, 여행사 직원이 최소 비용, 최단 환승 시간으로 짜준 항공 여정에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환승 시 스타얼라이언스, 스카이팀 등 같은 항공 동맹 여객기로 발권하면 항공권 가격도 싸고 마일리지도 한쪽으로 몰아서 쌓을 수 있다. 반대로 서로 다른 항공 동맹 소속의 항공기로 갈아타면 항공권 가격은 비싸진다. 남자는 위의 방식을 거부하고 가격이 더 비싼 타 항공 그룹 항공사로 환승 교체를 요구했다. 남자는 타보지 않은 항공사의 기내지를 손에 들고 의식을 치러야 했다. 몇십만 원의 비용 차이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래 초창기 남자는 여행사 직원에게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내지를 알현하고 모으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수집 취향을 알 턱이 없는 여행사 발권 담당자는 참 독특한 손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요구대로 별별 희한한 항공사를 찾아서 여정을 짰다. 남자는 모르는 항공사가 등장할수록 출장이 기다려지고 새로운 항로에서 거행할 의식과 손에 넣을 기내지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영어로 in-flight magazine인 기내지는 다른 잡지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다. 1952년, 미국의 항공사 팬암이 창간한 ‘클리퍼 트래블’이 시초다. 팬암은 1991년 해체되기까지 65년간 대륙 간 국제노선을 주름잡은 20세기의 대표적인 항공사였다. 보잉사의 제트여객기를 처음 취항 시키고 전자 예약시스템을 제일 먼저 도입한 곳도 팬암이었다.
남자는 이십여 년 전 미국 L.A.의 중고 서점에서 ‘클리퍼’ 과월호 몇 권을 발견했다. 축구와 삼바 춤의 나라 브라질, 가부키와 노 연극의 일본 등 나라별 주제로 꾸민 표지가 화려했다. 언뜻 보면 미국의 인문·자연지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과 비슷했다. ‘실제 비행에서 얻은 것’이라는 기내지 수집 원칙을 깨고, 남자는 1권당 1.5달러에 87년도 클리퍼 5권을 샀다. 기내지의 기원은 예외의 대상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사라진 항공사의 기내지는 희소성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남자는 가끔 상거래 플랫폼 이베이 이베이를 확인해 본다. 그때 산 기내지가 30불 정도에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남자는 깜짝 놀란다.
잡지로서의 기내지는 특이한 운명을 가졌다. 매월 말 기내에 배치된 새 호는 한 달 동안 지상에 머무는 시간보다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장거리 운항용 대형 기종 좌석에 꽂힌 것일수록 더 그렇다. 항공기의 편명이 바뀌는 매번의 비행마다 독자는 계속 바뀐다. 심심풀이로 펼쳤다 사진 중심으로 한 번 훑어보고 마는 사람이 대부분. 기내 영화와 휴대한 전자기기를 보느라, 어떤 이는 기내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주 소수만 기사 내용까지 꼼꼼히 읽고 필요한 부분을 찢어가거나 통째로 챙겨간다. 승객과 승무원이 모두 내려도 기내지는 자리를 지킨다. 표지가 찢어지고 속지가 너덜너덜해진 놈들만 다음 이륙 전 청소 시간에 교체된다.
월말이 되면 그달 기내지는 다음 호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신문이 ‘하루살이’라면 기내지는 ‘달포 살이’다.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서 그중 몇몇을 구해내는 일이 나의 임무야.’ 남자는 보통의 잡지와는 남다른 쓰임새와 존재 방식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기내지는 중고 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들다. 수요와 공급, 둘 다 없기 때문이다. 비행시간에 공짜로 잠시 읽는 잡지를 누가 지상의 일상생활 중에 찾겠는가? 기사 내용이 마음에 들면 챙겨서 내리면 된다. 대부분의 항공사는 기내지의 유출을 제지하지 않으니까. 과월호 기내지는 항공기 청소업체가 일괄 수거해서 폐기한다. 설령 누군가 폐지 더미에서 얼마를 빼돌리더라도 어떤 중고 서점이 그것을 사겠는가? 남자를 비롯한 극소수의 기내지 수집가를 빼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기내지는 잡지계의 유령인 셈이다. ‘기내’라는 좁고 닫힌 공간, 한 달이라는 유통기한에 갇힌 유폐된 존재. 남자는 매번의 비행에서 몇 부의 생명을 구해 집으로 가지고 온다.
남자는 1980년대 중반 재벌그룹의 종합상사에 취직하면서 무역업에 발을 디뎠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주로 전자기기, 소재, 부품 등 단가가 높은 공산품을 다루며 일을 배웠다. 초기의 해외 출장은 큰 항공사를 이용해서 선진국 위주로 다녔다. 그의 국가별 주요 항공사 기내지 컬렉션은 그때 대부분 완성됐다. 남자는 90년대 중반, 작은 수입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부품이나 완제품보다는 한국에 없는 원료, 특용작물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선진국보다는 저개발국과 오지를 다녀보고 싶은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거기엔 당연히 기내지 수집 목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다룬 첫 품목은 시베리아의 녹용. 구소련 해체 후, 1990년 러시아연방과 한국이 수교하자 수입업자들이 녹용을 찾아 몰려들었다. 초기에는 연해주,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 남부 산 녹용을 수입했다. 90년대 중반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 한국 경제는 흥청망청했고 때마침 한방 건강 열풍이 불어서 녹용 수요는 대기권을 향해 발사된 로켓처럼 치솟았다.
남자는 더 값싸고 질 좋은 녹용을 찾아 시베리아 오지를 뒤지고 다녔다. 러시아 극동의 캄차카반도 북부, 야쿠츠크가 수도인 사하 공화국에는 북방 원주민들이 광대한 툰드라 지역에서 반야생의 순록을 유목하며 살아간다. 이들이 키우는 순록의 뿔은 단가가 싸고 품질이 좋아서 운송만 잘하면 수지맞는 장사였다.
남자는 국적기 직항을 타고 하바롭스크로 갔다. 미리 소개받은 까레이스키(고려인) 안내인을 만나 캄차카반도 북부의 순록 유목민을 찾아 나섰다. 당시 러시아 극동에는 국적기 아에로플로트 말고도 마가단 에어, 코리약 항공 등 구소련 해체 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군소 항공사가 운항 중이었다. 기내지를 낼 형편이 안 되는 작은 항공사들은 조잡한 타블로이드 신문 같은 안내지를 만들었다. 항공사 임원의 동정, 지방의 작은 공항 소개, 지역의 행사와 소식을 전하는, 그야말로 동네 소식지 수준이었지만, 남자는 그 인쇄물을 서류 가방에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캄차카의 주도에 도착한 남자는 다시 헬기를 빌려 타고 툰드라 상공을 가로질러 에벤 족 유목민 텐트 주위에 내려앉았다. 수염이 더부룩한 촌장에게 인사를 하고 서울서 가져간 여자 스타킹, 도시락 라면, 초코파이를 선물로 주었다. 모두 당시 러시아에서 인기 많은 한국 상품이었다. 유목민들은 그를 따듯하게 맞아주었다.
노련한 몰이꾼 한 명이 머리 위로 올가미를 휘돌려서 순록 무리 중 한 마리를 낚아채 쓰러트렸다. 촌장이 잘 자란 순록 뿔 하나를 자르더니, 피를 받아서 마셔보라고 남자에게 건넸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사기잔을 받아 들고, 남자는 잠시 머리가 띵 해졌다. 한 모금 들이켜자, 쇠 녹 맛이 입안에 가득 차고 콧속 깊숙이 짐승의 영혼이 치밀어 올랐다. 남자는 자신의 피곤한 몸이 자작나무 숲의 우듬지 끝까지 솟구치는 줄 알았다. 촌장은 멀리서 손님이 왔다고 수사슴 한 마리를 잡아 넓적다리 고기를 찜으로 대접했다. 한 점 베어 물자 사슴 털 몇 가락이 씹히고 들짐승의 역한 내가 입안에서 진동했다. 독한 보드카 한 잔을 털어 넣었다. 냄새는 수그러들고 고기는 씹을수록 고소했다. 남자는 하룻밤 그들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묵으며 거래의 실마리를 만들어 나갔다.
97년 IMF, 2008년 금융위기가 왔을 때 남자의 사업도 서너 번 휘청거렸지만 잘 버텨냈다. 그것은 시장의 흐름을 읽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싸게 사 오는 법을 아는 자들의 특권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무역상이자 모험가인 신드바드라고 생각했다. 신드바드는 배를 타고 다니지만, 자신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각지의 특산품을 싸게 사서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 일을 한다고.
전 세계 수천 곳 항로를 날다 온 기내지의 마지막 기항지는 경기도 양평의 조용하고 아늑한 전원주택이다. 남자의 서재에는 10단 높이의 철제 책꽂이가 6개씩, 3면의 벽을 채우고 서 있다. 서가의 중간 단에는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 모형이 놓여 있다. 그 위아래 층에 수천 권 기내지가 입주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섯 대륙으로 크게 나눈 뒤, 국가별, 항공사별로 분류해서 연도, 월별로 가지런히 정렬했다.
남자의 수집품은 세로로 세우기 힘들어서 모두 가로로 누워있다. 대부분의 잡지가 그렇듯, 기내지는 표지와 내용 면의 두께가 얇아서 세워두면 책등 반대쪽 부분이 자꾸 휘어지고 쓰러진다. 저 혼자는 절대로 설 수 없고 몇 권을 뭉쳐도 버티는 힘이 약하다. 양쪽 끝을 북엔드로 지탱해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책가도에 나오는 한지로 만든 책들처럼, 기내지는 누워있어야 제맛이 난다.
남자는 자신의 서가에 모신 기내지들의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대략 2만 부 정도라고 짐작만 한다. 세어보려고 한 적도 없다. 숫자는 무의미한 부호일 뿐이다. 하나하나 고유한 여정을 가진 잡지에 일련번호를 붙이거나 머릿수를 세는 일은 잡지가 품은 사연을 모독하는 짓이다.
누워있는 책등에 찍힌 항공사, 기내지 이름, 발행 연도와 월수를 보면서 남자는 자신의 하늘 여행을 떠올린다. 알래스카 에어, 「비욘드」1998년 7월호.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를 이륙해서, 알류션 열도의 우나 알라스카 섬 더치 하버까지 비행하며 읽은 기내지. 수산물 수입 협상차 방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더치 하버 공항에 착륙을 앞두고, 코앞도 안 보이는 안개가 갑자기 끼는 바람에 비행기가 다시 앵커리지로 돌아온 적도 있다. 한여름 더치 하버에는 백야가 계속됐다. 태양은 자정까지 하늘에 머물며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한밤의 태양을 본 남자는 맨눈으로는 잠들 수가 없어 검은색 안대를 끼었다. 같은 항공사 기내지 1998년 8월 호도 같이 누워있다. 일을 다 마치고 다시 앵커리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며칠 오지 않았다. 결국 달이 바뀌고 나서야 남자는 섬을 빠져나왔다. 다음 일정이 틀어지는 대신, 보상으로 주어진 8월호 기내지를 들고서.
남자의 아내는 그의 이상한 수집 취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격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무역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번 뒤, 그는 아내를 데리고 새로운 항공사가 취항하는 처녀 항로를 찾아다녔다. 아내는 관광지가 아닌 오지 여행에 불만이 많았다. 함께 무역업을 시작했던 남자의 친구들은 와인 수입에 재미를 붙여서 스페인,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의 중저가 와인 산지를 다니며 좋은 술과 음식으로 호사를 누리는데, 왜 자꾸 험한 곳만 다니냐고 아내는 투덜댔다. 남자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2천년대 초반, 주류 수입에 관심을 돌렸다. 한국에 와인 붐이 일면서 남미가 값싸고 품질 좋은 포도주 공급지로 떠올랐다. 남자는 아르헨티나의 멘도사 계곡, 칠레의 카차폴 계곡 등지를 아내와 함께 다니면서 와인을 시음하고 현지 음식과 풍경을 즐겼다.
부부는 란칠레e 항공을 이용해 종단 6천 ㎞의 거리인 칠레의 북쪽 끝 아리카 지역부터 남쪽 끝 푼타아레나스까지 곳곳을 다녔다. 란칠레 항공은 브라질의 탐 항공사와 합병해 라탐 항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자는 새로운 항공사가 생기자 두 달의 일정으로 아내를 데리고 다시 남미로 향했다. 비행기 타기에 질린 아내는 산티아고, 상파울루에 머물고 남자는 혼자서 새 항공사가 취항한 작은 도시를 날아다녔다. 소설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밤새 우편 항공기를 몰고 중력을 거스르며 날았던 실존의 경로를.
‘이 항로는 아름답지만 가혹해. 우리에게서 많은 사람을, 그것도 젊은이들을 빼앗아 갔지.’
남미의 각지에서 우편물을 모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실어 오는 비행사 중 몇 명이 악천후로 실종된다. 안데스산맥 위로 몰아치는 태풍에 맞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몇 대는 만신창이가 돼서 겨우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남자는 소설 「야간비행」을 읽으며 비장해졌다. 죽음 앞에서도 비행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 항로를 날고 있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져 마음이 편치 않다. 기체가 돌풍에 휘말리는 순간, 집 생각이 간절하지만, 집의 침대에 누우면 다시 그 항로가 나를 부른다. 그 위를 날고 있을 때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삶.
남자는 여행 다닐 때 불경을 가지고 다녔다. 추락의 두려움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90년대 후반 작은 금광을 조사하러 알래스카 북부의 노움으로 날아갈 때였다. 남자가 탄 작은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울퉁불퉁 불규칙한 기류가 비행기를 장난감처럼 들어 올렸다가 한참 앞으로 내던졌다. 남자는 난생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남자는 금강경을 꺼내 읽었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깨달음이 열린다.
금강 金剛, 다이아몬드는 아무리 강한 물체도 다 잘라내고 뚫어낸다. 강건한 지혜는 어떠한 번뇌나 두려움도 이겨낸다. 죽음의 공포도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앞당겨 찾아온 죽음과 나중에 맞게 될 죽음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늘을 가르는 비행운이 아름다운 이유는 잠시 후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 남자는 금강경의 구절을 되뇌었다.
그는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아침마다 반야심경 외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남자는 절에 자주 가지는 않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는 마음속에서 너무나 당당하게 솟아나는 수집욕을 불교의 교리로 정당화하고 싶었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다. 실상 없음에 관해, 삶과 우주의 규정할 수 없음, 그 무한함 앞의 겸손함을. 금강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물의 비유는 모래와 뗏목이다. 뗏목을 엮어 타고 내려왔으니 이제 그것을 풀고 나눠서 제각각 갈 길로 보내야 한다. 엮였다가 풀고, 풀었다가 엮으니, 뗏목의 실제 모양은 무엇인가. 붓다는 수십 번 얘기한다. 갠지스강의 무수한 모래만큼이나 많은 갠지스강이 더 있고 그 많은 강에 또 무수한 모래들이 있음을, 그 끝나지 않는 무한의 수레에 올라타고 끊임없이 전진해야 함을. 그는 하나의 항로를 하늘 위의 참선, 수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비행기의 뗏목에 올라타서, 허공을 가로지른다. 지상에 내린 승객들은 해체된 뗏목의 통나무처럼 뿔뿔이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그 허한 찰나의 증표로 기내지를 모은다. 그것은 물신에 사로잡힌 행동, 집착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인간의 기이한 업, 그 색과 상을 잠시나마 관조하는 일이다.’
그의 나이 마흔 중반쯤 남자의 친구 한 명이, 그렇게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하는데 직접 비행 조종술을 배워 경비행기를 몰아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그것도 해볼 만하겠네.’라는 생각이 들어 남자는 비행학교에 등록했다. 경비행기의 구조와 비행 시스템을 익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조종의 기본 기술을 배웠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민간 비행장에서 조종석 뒷자리에 앉아 조종 강사의 이착륙 강의도 듣고 실제 비행도 했다. 하지만 항공 조종사 자격증을 따기 직전 그는 행동을 멈췄다. 새로운 항로를 날아본다는 것은 그의 비행 경력 수장고를 확장하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한 컬렉터, 수집가는 수집물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거두어들일 뿐. 새로 만드는 것은 수집품들 사이에 존재하는 고유한 객관의 질서를 깨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희한한 동물은 별의별 사물을 다 모은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이상한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수집품이 존재한다. 각양각색의 너트와 볼트,
만년필, 연필, 지폐, 우표, 책의 초판본은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한다. 맥주병 뚜껑, 포도주병에 붙은 라벨, 위스키 빈 병, 술집의 잔 받침을 모으는 애주가, 온갖 화려하고 섹시한 속옷에 환장한 페티시스트, 심지어는 자기와 잠자리를 한 여성들의 거웃을 모으는 호색한도 있다.
나는 자연물을 모으지 않는다. 나비, 잠자리 같은 곤충, 조개껍데기, 짐승 가죽, 알을 모으는 수집가도 있고 전 세계의 기생충을 모아서 전시하는 도쿄의 기생충 박물관도 있다. 나는 박물학자가 아니다. 내가 만약 완결에 사로잡혔다면 파산해서 사라진 항공사의 기내지를 모았을 것이다. 팬암은 1927년 설립돼 1991년 4월 문을 닫았다. 아쉽게도 팬암은 내가 직업을 가지기 전에 사라져서 한 번도 이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기내지를 모은다고 했더니 언젠가 미국의 거래처 대표가 팬암 기내지를 구할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완결판을 가진 수집가가 있는데 팔 의향이 있을 거라고. 나는 호의는 고맙지만 이미 완결된 컬렉션에는 관심이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수집에 완결판이란 없다. 수집의 여백은 더 늘어나고, 깊어져야 한다. 완결은 고인 물이고, 고이면 썩을 수밖에 없다. 완성에 대한 강박과 집착은 수집의 즐거움을 망친다. 수집은 그 과정의 극적인 긴장, 굴곡의 사연으로 풍성해져야 한다. 한 권의 기내지를 얻기 위해 거친 여정이 없다면 수집품은 글자와 사진이 담긴 종이 더미에 불과하다. 내가 유일하게 완결할 수 있는 건 내 삶뿐이다.
나는 체험의 수집가다. 여객기의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처음 만나는 대지와 건물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의 비행에 관해 명상한다. 나는 그 비행의 기념품, 내가 지구의 대기권을 가르며 남긴 흔적, 창공의 명함을 모은다. 나는 무턱대고 사 모으는 성미 급한 수집 환자가 아니다. 바퀴 달린 지게차, 적하기로 수집품을 퍼 담는 도매상인이 아니다. 과대망상증 수집가들은 과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LP 음반 수집광이 있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그의 수집 창고를 방문해 인터뷰한 기사를 썼다. 그는 운수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한 달에 몇십만 장씩, 지금까지 수천만 장을 전 세계로부터 사들여 창고에 쌓아둔다. 그가 그 수천만 장의 음반을 일일이 턴테이블에 얹고 노래와 연주를 들어 보겠는가? 애호가의 귀가 들어주지 않는 음반은 플라스틱 조각일 뿐이다. 그는 저장강박증 환자일 뿐 진정한 수집가가 아니다.
수집된 물건은 체험 그 자체는 아니다. 대다수의 저급한 수집가들은 물건을 체험 그 자체로 착각한다. 수집품은 체험을 지지해 주는 닻과 같은 것이다. 수집품에는 체험의 영靈, 혼魂이 깃들어야 한다. 진정한 수집가는 수집품과 함께하는 순간 발현하는 체험을 즐기고 육화해야 한다. 그러면 수집품은 자기 고유의 아우라로 빛난다.
수집욕은 권력의 행사, 지배욕의 실현, 소유욕의 완성은 아니다. 남자는 지신의 행위는 하나의 탐구 과정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수집은 완결, 완성에의 도전이 아니고, 무한을 향한 항해다. 독립해서 30년간 존속하다가 옆의 강한 나라에 먹혀 망한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 나라가 발행한 모든 우표를 모으는 게 평생의 목표인 어떤 수집가가 있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멸망한 나라의 우표 컬렉션을 완성하려고 한다. 컬렉션에 빠진 마지막 한 장의 우표가 경매에 나온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넣고 하나 남은 빈칸을 채운다, 완결판을 만든다. 그 나라의 망명정부가 새로운 우표를 발행하기 전까지 그의 수집은 더 이상 확장할 곳이 없다. 그의 수집품은 완결되는 순간 죽음이다. 생명이 아니라 화석이다. 인간이 완결할 수 있는 수집 목록이란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자신의 완성이다.
2천 년 대 초반 남자는 카카오 열매를 수입하기 위해 아프리카 중서부의 국가 가나를 방문했다. 일을 마치고 남자는 대학 시절 읽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소개된 곳을 찾아갔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엔 지역 명물인 토속적인 관을 짜는 장인 파 조의 공방이 있다. 고객이 원하는 모양이면 뭐든지 다, 동식물이든, 집에서 사용하는 물품,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이든 그는 아프리카의 화려한 색채로 맞춤형 관을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취향은 정말 다양하다. 사자, 독수리, 커다란 게, 심지어는 뱀 모양의 관도 있다. 축구에 열광하는 아프리카답게 축구화 관도 인기다. 코카콜라를 입에 대지 않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든 사람은 콜라병 모양의 관을 주문한다. 캐딜락 옛 모델을 본뜬 자동차 관, 우주선 로켓 관도 있다. 로켓 관은 하늘로 곧 발사할 것처럼 곧추서 있다. 저 관을 묻으려면 얼마나 깊게 땅을 파야 하나? 저 관을 집으로 삼으면 서서 영면해야 하나? 남자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관 중에서도 남자의 눈길을 끈 건 ‘에어 캐나다’ 붉은 로고가 새겨진 여객기 모양의 관이었다. 당시 에어 캐나다는 아프리카에 취항하지 않았는데 누가 저걸 주문했을까, 남자는 장인에게 영문을 물었다. 어떤 노인이 에어 캐나다 광고가 실린 잡지를 들고 와서는,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봐서 마지막은 거기 실려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나 인들의 화려하고 독특한 장례 풍습에 매료된 남자는 한나절 머물면서 장인이 관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 보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때 남자는 저런 관을 한국으로 수입해 팔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봤다. 그 관이 자신의 노후에 다시 떠오를 거라곤 짐작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자는 자기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건강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내지 수집, 항공 여행 인생을 매듭지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일흔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남자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로 떠났다. 15년 전에는 인접국 시에라리온을 들른 후 거기서 가나의 안트락 항공을 타고 수도 아크라로 입국했다. 그 사이 그 항공사는 파산했다. 이번에는 처리할 일이 한 가지라 시간을 줄이기 위해 런던에서 영국 항공 브리티시 에어웨이 직항을 탔다. 파 조 장인은 기력이 많이 쇠하고 배가 더 나왔지만, 수습생들을 지도하며 아직도 관을 짜고 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공방의 전시장은 형형색색 다양한 관으로 가득했다. 전에는 노키아 초창기 핸드폰 모델의 관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 애플의 아이폰 모양의 관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장인에게 생텍쥐페리가 몰았던 쌍발 프로펠러 단엽기의 사진을 건네며, 잘 타는 나무 재질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남자는 비행기 관이 한국의 화장 가마에 들어가지 않을까 봐, 가마의 규격을 미리 알아갔다. 가마보다 작게, 비행기의 날개를 접고, 바퀴도 동체에 접어 넣을 수 있게 설계를 부탁했다. 파 조 장인은 줄자로 남자의 키와 허리둘레를 쟀다.
제품 인도일은 한 달의 선박 운송 기간을 포함, 6개월 뒤로 맞췄다. 장인은 날개를 접는 구조가 평소보다 품이 더 든다고 보통의 제작비보다 30% 더 비용을 청구했다. 남자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흔쾌히 관의 제작 비용은 물론, 배로 부칠 때 드는 운송료, 통관 비용까지 치렀다.
남자가 관을 기다리는 사이, 승객 230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가 흔적도 없이 공해상에서 사라졌다. 4개월 뒤 같은 항공사의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러시아군의 미사일 오발로 공중 폭파됐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비행기 여행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수백 명이 땅 위에 제대로 묻히지 못하고 비행기를 관으로 삼은 일이 꼭 비행기 관을 주문한 자신의 책임인 양 가슴이 아프고 미안했다.
6개월 뒤 가나에서 비행기 관이 세관에 도착했다. 남자는 통관 업무로 한창 드나들었던 인천공항 세관을 오랜만에 찾아갔다. 세관원이 물었다. 이상하게 생긴 나무 상자의 정체는 무어냐고, 용도가 뭔지, 혹시 혐오 물품은 아닌지. 남자는 차분히 설명했다. 화려한 원색이 칠해진 이 나무 비행기는 죽음의 예술품이다, 아프리카의 혼을 담은 항아리, 나의 미래를 담을 상자다.
남자는 비행기 관을 양평의 전원주택으로 옮겼다. 주말에 부모를 찾아온 남자의 아들과 딸 가족은 마당에 내놓은 비행기 모형을 신기해했다. 손주들은 날개에 매달려 놀았다. ‘어, 이거 열리네’, 관 뚜껑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기면서 장난꾸러기 손자가 말했다. 아이들은 관인 줄도 모르고 안에 들어가 숨바꼭질 놀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중에 기내지는 다 어쩔 거냐고 아들이 물었다. 아들은 남자의 수집벽을 물려받지 않았다, 엄마를 닮아 천성이 뭔가 쌓이는 것을 질색했다. 너와 엄마에게는 저게 다 짐이 되겠지? 어디 기증할 곳이 없을까? 항공박물관이나 잡지 박물관을 한 번 알아보마. 정 안되면 자신이 누운 비행기관과 함께 기내지도 화장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방법도 있다. 화장 가마에 저 많은 수집품이 들어갈지 의문이지만, 폐지 고물상에 톤으로 팔려나가는 꼴은 상상도 하기 싫다. 아니면 기력이 쇠하기 전에 드럼통을 하나 구해서 그 안에 넣고 전부 태울까? 그 재를 숲에 묻으면, 종이를 만든 나무를 위한 거름이 되지 않을까?
햇빛 찬란한 어느 가을날, 남자는 헛간에 넣어둔 단엽기 관을 양지바른 마당으로 끌어낸다. 실제 크기보다 삼 분의 일 정도 작지만, 프로펠러, 바퀴까지 달린 영락없는 진짜 비행기다. 활주로가 아닌 잔디밭에 앉은 모습은 꼭 날개가 꺾여 불시착한 커다란 새 ‘앨버트로스’ 같다. 남자는 기체의 위 뚜껑을 열고 관 속에 눕는다. 필리핀의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깊고 푸른 하늘에, 연습 비행하는 전투기 세 대가 굉음을 내면서 지나간다. 세 줄의 비행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을, 함께 보라.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다.
내가 거쳤던 항로들은 벌써 다음 생으로 스며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이 나무 새가 마지막 날갯짓할 때가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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