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히 살아갈 마음을 먹어버리자[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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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먹는담.
흙도 채 털지 않은 손가락만 한 당근이었다.
'흙에 심으면 싹이 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콩은 살아 있는 것이다. 씨앗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한 살아 있는 콩. 그것을 먹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하지만, 그렇지만, 포근하고 따스하기만 한 생활 따위는 없다. 냄새로 분간해 낸 작은 모순도, 당혹도, 기쁨도, 눈물도, 언쟁도 일상 여기저기서 숨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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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서서히 잎이 시들었다. 수확해야 할 때였다. 흙 아래 잠긴 당근은 얼마나 자랐을까. 막상 뽑아 보니 무성한 잎에 비해 애걔, 볼멘소리가 나올 만큼이나 볼품없었다. 그렇지만 예쁘다고 생각했다. 시간과 마음을 줘버린 만큼의 기쁨과 예쁨이 조그만 당근에 서려 있었다.
아이가 키운 ‘튼튼이’를 수확해 나눠 먹었다. ‘튼튼이’를 먹고서 우리도 튼튼히 살아가야지. 씩씩한 마음으로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당근을 키운 아이의 시간과 마음도 함께 오물오물. 이상하게도 서늘하고 뭉클한 기분이 번졌다.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라는 책에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작가가 강낭콩을 사러 간 이야기가 나온다. “흙에 심어 봐요. 싹이 날 테니까”라며 시장 상인이 건네준 강낭콩을 만져본 작가는 불현듯 두려워진다. ‘흙에 심으면 싹이 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콩은 살아 있는 것이다. 씨앗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한 살아 있는 콩. 그것을 먹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하지만, 그렇지만, 포근하고 따스하기만 한 생활 따위는 없다. 냄새로 분간해 낸 작은 모순도, 당혹도, 기쁨도, 눈물도, 언쟁도 일상 여기저기서 숨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콩을 사서 먹는다. 당근을 키워 먹는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라 여길 때는 아무렇지 않지만, 막상 작은 것들을 손으로 만져 보았을 때의 생기를 떠올리자면 기묘한 기분이 스민다. 우리는 그것들을 삶고 데치고 볶아 먹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더욱이.
돌보는 사람이 되었을 때에야 하루 세 끼 지어 먹이는 일의 경이로움을 알았다.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고 상을 치우는, 수고롭고 지겨운 일을 날마다 해내야만 생명은 자란다. 매일 끼니를 지어 먹이며 아이들을 살리고 나도 살아간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생명을 키우는 일은, 두려운 일이구나 생각한다. 평온한 나날에도 어딘가 숨어 있을 모순과 부조리를 실감한다.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날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실은 수많은 불행이 비껴가며 만들어진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언제고 불행이 멋대로 발을 걸어 상처받을 수 있음을 명심한다. 따스한 아이들의 손은 잡고서 나는 매일 그걸 생각한다.
혹여 두려운 날이 온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그때도 밥을 지어야지. 정성을 다해 밥을 지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살아갈 힘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작고 감사한 것들을 조물거리며 오늘도 밥을 짓는다. 다 같이 먹자. 우리 튼튼히 살아갈 마음을 먹어버리자.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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