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부문 당선작 - 사랑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박선우론[2026 경향 신춘문예]

김상민 기자 2026. 1. 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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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사랑 얘기가 아무리 진부하다고 할지라도 감히 그 누가 사랑의 권능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친밀한 이들의 ‘얼굴’을 앞세운 채 사회적 불의를 공모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사랑은 우리의 여남은 대안으로 간주된다.2)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사랑은 적대와 혐오로부터 승리할 수 있으며 끝내 승리하고 말 것이다.3) 이에 부응하는 듯 박선우의 소설 속 이 미련한 주체들은 사랑에 관한 한 자신의 역능을 과대평가한다. 우리가 구조주의 철학자들로부터 배웠던, 자신이 몸담아온 세계를 등한시할 수 있는 ‘순수한’ 주체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은 사랑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햇빛 기다리기」 속 ‘너’는 잦은 이사에 지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로 한다. ‘네’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나’는 가책을 느낀다. 어떤 법적 보증도 없는 상태에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현금을 증여하거나, 함께 빚을 갚아 나가기로 약조하는 일은 비단 성소수자에게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압도하는 지점”(201쪽)들은 이내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변명으로 치부되고 만다.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연인에게 그냥 전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해서 이렇게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것일까. 내 안위를 가늠하고, 파국을 넘겨짚고, 골치 아픈 문제들을 외면하고자 우스갯소리만 늘어놓는 것일까.”(201-202쪽)

‘나’는 사랑의 이름 아래 감히 자신을 둘러싼 거대 현실과 대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거대 현실은 사랑에 대한 이들의 열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해피엔딩이나 핑크빛 로맨스 따위를 약속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마음」에서 ‘너’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반드시 독점의 형식을 취해야만 하는지 물으며 우리가 ‘보통의 연애’를 지속하는 데 끊임없이 훼방을 놓는다. ‘너’는 그저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지 그것에 어떤 저의도 없었다고”(15쪽) 말하지만 부산으로 출장을 가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한다거나 순전히 저녁을 혼자 먹기가 싫어 데이팅앱으로 이름 모를 사람을 불러내는 건 도무지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사랑의 방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보통의 연애 관계를 지향하는 ‘나’와의 만남에 회의를 느낀 ‘H’는 사 년에 가까운 연애에 휴지기, 한 달 남짓한 ‘사랑의 방학’을 갖는다. ‘나’는 서로를 독점하듯 연애하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H’의 말이 실은 완곡한 이별 선언이 아닌지 “헤아리고 또 헤아”(174쪽)리며 그런 요상한 이름의 휴지기가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흐느낀다. ‘P선배’는 이 미련한 사랑의 주체에게 “인간은 최소한의 제약마저 없으면 방종에 빠지게”(192-193쪽) 된다고 말한다. ‘나’는 ‘H’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구속이 어쩌면 서로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배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끝내 ‘너’를 이해하기로 결심한다.

한 달로 예비했던 사랑의 방학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종료되었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도했다. 그리고 1400일 넘게 지속되었던 나의 사랑이 오늘로써 완결되었음을 깨달았다. 대신에 전혀 다른 사랑이 시작되는 듯한 조짐을 느꼈다. 오랫동안 내가 믿어온 사랑이 저물고 사그라든 자리에 아직은 내가 믿기 어려운, 감당할 수 있을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랑이 새롭게 움트며 자라나는 듯한 기척을.

―「사랑의 방학」(198쪽)

박선우의 소설 속 타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오래 몸담아온 세계의 진실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설 속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며 빈 편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결혼식 가는 길」), 기껏 쓴 편지도 결국 보내지 못한 채 서랍장에 묵혀두는(「고요한 열정」) 그야말로 조심스럽고 유약한 인물이다. 그런 ‘나’는 ‘너’로 인해 “오랫동안 내가 믿어온 사랑”의 토대를 허물며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랑”의 미래를 기약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의 권능에 대한 박선우의 신임은 조금 다른 여지를 갖게 된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방되는 문학을 향한 사회적 기대란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타자의 세계에 연루된다는 데 있지 않겠는가. ‘너’의 사소한 행동 버릇에서부터 전연 상상해 본 적 없던 관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것들과 무관하지 않다.

「밤의 물고기들」 속 ‘나’를 보자. ‘나’는 ‘누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오픈리 게이인 ‘그 남자’와 술을 마신다. ‘나’는 “어째서 모두가 뜯어말리는 짓을 기어코 해버리느냐”며 도대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에 “무슨 미래”가 어떠한 “결실”(29쪽)이 있을 수 있느냐며 ‘그 남자’에게 반감을 보인다. ‘그 남자’를 향한 반감에 한편, ‘나’는 혹시 자신의 일생 주변에 ‘그 남자’와 같은 게이가 있었는지 그 시절에 ‘나’는 왜 “내가 아닌 누군가 되어보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32쪽)는지 스스로에게 계속된 질문을 던진다. 이는 끝내 “나는 나였고,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32쪽)던 위태로운 자기 암시로 귀결된다. ‘그 남자’와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 ‘나’는 자신이 거의 안다시피 ‘그 남자’에게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통해 전해져오는 ‘그 남자’의 축축한 열기에 거부감을 표하기는커녕 외려 “억눌러야만”(36쪽) 하는 어떤 충동에 흠칫 놀란다. “그 밤, 그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던 대화도 떠올리게 된다. 그의 굵고 나직한 음성, 반복적인 고갯짓, 팔뚝에 어지러이 새겨진 꽃과 이파리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뜨거운 체온이 어린 허벅지,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준 원형의 플라스틱까지. 그 안에서 조그마한 불씨처럼 일렁이던 잉어의 몸짓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사실 그건 잉어가 아니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내게는 잉어로 남아 있고, 그렇게 새겨져버린 듯하고, 그건 돌이킬 수 없는 듯하다.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늘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39쪽)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던 고집스러운 자기 암시가 “억눌러야만” 하는 충동으로 변모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타자의 세계에 연루된다.

세계의 기술적 진보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일면식도 없는 저 먼 곳의 타자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타자와 접촉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기술적 발달만으로는 결코 담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맞춤형 알고리듬 속 타자는 오직 내가 보고 싶은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무수히 증식되는 타자의 얼굴에서 내가 ‘모르는’ 얼굴은 없다. 자기 확신이 팽배한 현실에서 연루됨의 감각은 점차 소실된다. 자기로 포화된 이 세계에서 사랑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박선우가 아직 사랑의 권능을 신용한다고 할 때 그가 낭만적 위안을 얻고 싶다거나 사랑이 끝내 문제적 현실에 궁극적(보편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무방비하고 특별해지는가. 이 지극한 사랑의 서사를 통해 자기중심적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를 타자라는 미지의 세계에 노출시키는 사랑의 가능성을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을(乙)들의 연대

박선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말이지 다정하고 섬세하다. 서로에 대해 깊이 내적 교류를 했던 선배가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린 것도 모자라 갑작스레 청첩장을 보내도 서로가 함께했던 시간을 아름답게 추억하며(「결혼식 가는 길」),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진 친구가 막무가내로 이별을 고해도 친구의 행복을 바라며 손을 흔들고(「이 세상의 것」),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걸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엄마를 미워하다가도 아빠 없이 자신과 형을 홀로 키워왔던 지난날 엄마가 느꼈을 서글픔을 떠올리고(「겨울의 끝」, 『어둠 뚫기』), 끊임없는 혐오를 퍼부으면서도 외려 성소수자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에 별안간 분노하다가도 이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과 닮아가는 게 더 무서운 일이라고 웃음을 지으며(「사랑의 미래」), 오 년 전 갑작스레 이별을 고한 뒤 사라진 옛 연인의 죽음을 정성스레 애도하는(「빛과 물방울의 색」) 이들이 바로 박선우가 그리는 사랑의 주체들의 얼굴이다. 박상수는 이들을 두고 “‘맨박스’에 갇히지 않은 남자”라고 평하며, 이들이 지닌 유연한 남성성이 “맨박스에 갇힌 남성들이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이성애 우월주의나 호모포비아가 얼마나 편협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납득”시킨다고 덧붙였다.4) 이들이 보여주는 세심함은 분명 기존 남성성의 헤게모니와 대적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관계의 파탄과 상처를 가만가만 반추하고 또 아름답게 포장해내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소위 ‘남들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다. 과연 퀴어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넉넉한 이해심을 보장해주기에 충분한 것인가.

‘동성애 규범성(homonormativity)’이라는 개념으로 함축되는 일련의 논의들은 소수자적 정체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기존 체제(질서)에 대한 저항의 근거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5)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인물들이 이토록 타자에게 다정할 수 있는 건 이들의 특유한 정체성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내가 사랑하는] ‘너’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해할 필요도 없던 것이 ‘너’에 의해 생각할 만한, 이해할 만한 것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박선우의 소설에서 진정 퀴어한 것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같은 게 아니다. 그의 관심은 이 문제적 사랑을 현존하는 규범 내에서 납득할 만한, 인정해줄 법한 형태로 재가공하는 데 있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퀴어해지는가. 사랑은 우리를 얼마나 퀴어하게 만드는가. 신샛별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선우는 “퀴어‘만’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사랑에 관한 결핍과 상실을 보편의 권리 담론으로 가공해” “퀴어의 박탈감과 불능감을 사랑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의 불행”으로 이행시키는 사랑의 권능,6)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오랜 규범을 의문에 부치게 하는 사랑의 가능성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사랑」에서 ‘나’는 HIV 감염인인 ‘너’를 만난다. 애프터 신청을 받은 ‘너’는 담담한 어조로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나’는 ‘네’가 “단지 연인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가능성 하나 때문에 자신의 내밀한 질환을 털어놓아야 했을 순간”(127쪽)들이 얼마나 빈번했을지를 생각하며, 그러한 비밀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네’가 겪어왔을 상처와 고통을 짐작한다. 과연 그 짐작이 적당한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헤아리기엔 ‘나’ 자신의 상황 역시 그리 순조롭지 않다. ‘나’ 역시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견고한 규범 안에서 담론적인 모욕을 감내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태원은 ‘을(乙)’에 대해 “보편의 잔여”로서 우리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한 불평등과 불공정,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체현한 존재론적 위상이라고 정의한다.7) 사랑은 ‘나’로 하여금 단지 ‘너’를 마주하기를 넘어서 을로서 ‘너’를 감각하게 한다. 인식론적 수준에서 을의 존재는 내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실재의 수준으로 이행한다. ‘나’는 ‘너’를 통해 살아 있는 을의 얼굴을 감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내가 을이라는 사실이 곧 또 다른 을들과의 연대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의 문화정치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야말로 당대성(contemporary)을 지닌 ‘우선’적인 문제이고 여타의 고통은 ‘나중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하며, 고통의 위계를 형성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8)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고통의 위계 속에서 을들이 겪는 사회적 취약함이 “피해자성이라고 하는 의사소통 행위로 전환”된다는 것이다.9) 즉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겪었고 어떻게 이를 해소할 것인지의 문제는 내가 느낀 고통을 더욱더 전략적으로(극적으로) 표현하는 일로 인해 뒷전으로 밀리고 만다. 고통은 그 주장의 파급력에 따라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며 공론장은 각자의 진실을 최우선으로 배치하기 위한 담론적 투쟁의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내가 가장 솔직해지고 싶었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사람 앞에서 다시금 말을 꾸며내야 했을 때, 나는 실로 오랜만에 클로짓 게이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커밍아웃이라는 장벽과 전혀 다른 차원의 난관에 처음으로 맞부딪치는 경험을 했다.

―「우리 시대의 사랑」(119쪽)

‘나’는 ‘너’를 보며 “커밍아웃이라는 장벽과 전혀 다른 차원의 난관”을 마주한다. 사랑은 ‘나’로 하여금 마주한 적 없는 ‘난관’ 앞에 서게 한다. 그러나 그 ‘난관’은 ‘나’를 멈춰 세우게 하지 않으며 또 다른 을의 살아 있는 얼굴을 감각하게 하는 기회로 작용한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을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어둠 뚫기』 속 ‘엄마’와의 관계에서 극대화된다. ‘엄마’는 스무 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해 스물하나에 첫아이(=‘형’)를 가지고 스물다섯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채 홀로 ‘나’를 키웠다. 열두 살 때 남자를 좋아한다는 첫 고백에 어두운 방 안으로 ‘나’를 내팽개친 이후로 서른셋의 두 번째 고백에 이르기까지, ‘엄마’는 ‘벽장’ 안에 머문 이십 년을 포함한 한평생 ‘나’를 길러냈다. ‘나’를 생존하게 해주었다는 감사함에 한편 ‘나’는 ‘엄마’를 증오한다. ‘엄마’는 ‘나’의 커밍아웃에 불구하고 마치 없던 일처럼 결혼 계획을 묻고 ‘형’에게 아빠 대신 네가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홧김에 내뱉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무언가를 썼다는 감각이 ‘엄마’를 향한 욕설이었다던 ‘나’의 회고는 ‘엄마’에 대한 ‘나’의 애증을 드러낸다.

‘엄마’는 가장 ‘내’ 편에 서도 모자랄 판에 ‘나’에게 지속해서 상처를 주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나’는 도대체 왜 ‘엄마’를 이해하고자 하는 걸까.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었다”(13-14쪽)던, “만약에 나의 수명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는 여생의 절반쯤 한 알의 캡슐로 응축하고 싶다. 그걸 영양제 통에 슬쩍 넣어두고 아침에 엄마가 꺼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내 삶이 엄마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177-178쪽)던 절박한 언설은 단지 ‘엄마’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일 뿐인가.‘엄마’는 청력 손실로 인해 주변의 소리를 절반만 들으며 ‘분위기를 보는’ 삶을 살아냈다. ‘나’는 “적당히 넘겨짚기 어려운 상황이나 낯선 이들 틈에서 혼자 당황하여 전전긍긍했을”(91쪽) ‘엄마’의 삶을 떠올린다. 친구라는 사람들이 ‘엄마’가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다고 쑥덕거려도 그들마저 없으면 주위에 함께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길길이 날뛰는 ‘나’를 진정시키는 ‘엄마’의 모습은 성소수자로서의 ‘내’ 삶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일상 속 거리낌 없이 발화되는 모욕과 적대감의 말을 참아내는 것은 단지 ‘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통해 또 다른 을의 얼굴을 본다. 절반만 듣는 ‘엄마’의 귀와 성소수자라는 낙인 탓에 사람들에게 절반의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입은 닮아 있다. ‘엄마’도 기실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을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박선우의 소설이 성소수자의 여느 성장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그 무엇도 ‘확실히’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혜진은 박선우의 소설을 읽으며 “‘퀴어이기 때문에’ 겪는 선명한 환희와 갈등”보다 “뭐라 이름 붙여지지 않았고 ‘완치’ 불가능한,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내 안에서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을 어떤 변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10) 한여름 보청기를 착용하는 비애를 고백하며 “내가 남들 말을 좀 놓치는 거는 기분이 안 나쁜데, 화장실에서 휴지로 몰래 귓구멍의 진물을 닦고 있을 때 …(중략)… 남들은 평생 모르고 살 일을 나만 당하는 것 같아서 억울”(189-190쪽)하다는 ‘엄마’가 정작 ‘나’에게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문제 있는’, ‘제대로 되지 않은’, ‘정상이 아닌’ 존재라며 타박하는 모습을 보라. “맞서다 보면, 부딪치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줄 알았으니까. 더디게나마, 아주 약간이나마 우리가 포개질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191쪽) ‘나’의 이해는 타자의 감응으로 화답받지 못한다. 오히려 ‘나’가 얻는 것은 ‘엄마’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어둠 뚫기』는 무지와 불확신에 대한 경계심이 도리어 을들의 연대를 ‘나중’의 것으로 유보하게 하는 구실로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묻는다. ‘나’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 느꼈냐던 인터뷰 질문을 복기하며 다소 우스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라니?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특성으로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가. 모두가 예외 없이 서로에게 별종이 아닌가.”(137쪽) 타자와 연대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가? 우리는 지난해 겨울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철야 농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담요를 덮어주고, 들은 적 없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공중에 나부끼는 이름 모를 깃발과 형형색색의 응원봉에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을 투영했다. 을들의 연대 가능성이 관측된 곳에서 타자에 대한 무지와 불확신은 결코 결격 사유가 되지 않았다. 인식론적 범주가 무력해지는 순간, 타자와의 친밀한 접촉이 인식론적 범주를 대리 보충(supplement)하는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연대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다. 박선우가 사랑의 권능에 대해 주목한 것도 이러한 맥락과 상통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따금 우리는 무지와 불확신이 압도되는 순간을 경험(감각)한다. 사랑에 정동된 주체는 서로가 함께할 미래를 기약하고 하물며 오랫동안 믿어온 세계의 진실을 포기한다. 열정적이라고 부르든 맹목적이라고 부르든 사랑이 우리에게 ‘인식의 벽’을 허무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3. 이 지리멸렬한 사랑 얘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건

돌이켜보면 좀 우스운 구석이 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라니?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특성으로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가. 모두가 예외 없이 서로에게 별종이 아닌가.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어둠 뚫기』(137쪽)

사랑의 권능에 대한 박선우의 기대는 결코 무작정의 믿음이 아니다. 박선우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지점이 된다는 것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는다. 애인이 프런트에서 예약 내역을 확인하는 동안 내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사랑의 미래」),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이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남아 있는 마음」, 40쪽)는 것은 이 사회에서 ‘다른 남자’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나’는 “사회적 몰이해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싶은 것도, 만천하에 성 정체성을 공표하고 싶은 것도 아니”(22쪽)라고 했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에 대해 모욕과 혐오가 빗발치는 현실이 바로 오늘날 사랑의 세계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현실은 이들에게 너그럽지 않다. 기껏 용기 내어 시도한 커밍아웃도 가족들의 무관심에 의해 유보되는 모습을 보라.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결혼할 것이냐며 ‘나’를 타박하며(『어둠 뚫기』), ‘형’은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 가족 등록을 하면 나중에 결혼할 때 축의금을 받을 수 있다고 ‘나’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본다(「햇빛 기다리기」). ‘나’의 커밍아웃은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픔이든 배신감이든 하다못해 혐오감이든 그 어떤 반응도 야기하지 못한 채 원천적으로 부인된다(“연말정산도 아니고 무슨 커밍아웃을 해마다 새로 하나… 도무지 무엇을 위해 이런 실랑이를 되풀이해야 하는지 그 의미조차 알고 싶지 않은 지경이 되었던 거예요.”(196쪽)). 박선우는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는 버거움을 차치하더라도 그 시도조차 녹록지 않은 현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이 사랑의 세계에서 연대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은 여간 신산한 게 아니다. 가령 ‘내’가 욕설이 난무하고 여직원들을 향한 성적 농담을 서슴지 않는 술자리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그 어떤 고양감도 안겨주지 않을뿐더러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고통을 심화시키곤 한다. 남직원들 사이에선 유난스러운 아웃사이더로 여직원들에게는 어쨌거나 우리를 험담하는 남자 집단의 일원으로 ‘나’는 각각의 집단으로부터 이중적으로 배제된다. 이처럼 ‘나’에게 현실이란 “이쪽 편도 될 수 없었고 저쪽 편도 될 수 없”는, “온전히 남자가 될 수도 없었고 당연히 여자가 될 수도 없”어 끝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둠 뚫기』, 43쪽)는 곳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로 하여금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퀴어’라는 불편부당하고 모욕적인 수식언을 자기 긍정의 언어로 재전유한 사례에서 보듯 사회의 바깥에서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 어떻게든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며 이는 ‘퀴어’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나’의 사회적 존재됨을 확언해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남자인 ‘나’와 남자인 ‘너’는 사랑을 통해 서로의 실존을 목도하며, 심지어 ‘나’를 향한 혐오 역시 부정적인 방식으로 성소수자인 ‘나’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다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누군가를 잃을까 봐”(「사랑의 방학」, 197쪽) 무섭다던 말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의 관계에 대한 ‘나’의 애착은 가히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렇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그렇고 자비에 돌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중략)… 게이들은 왜 하나같이 마마보이인 거”냐며, “어째서 게이들은 엄마한테 집착하는 경향”(30쪽)이 있냐던 친구의 물음에 대한 얼마간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둠 뚫기』에서 ‘나’는 각자의 ‘작은 비밀’을 주제로 한 글쓰기 수업을 하며 ‘좋은 글’에 대한 자기의 소신을 밝힌다. “언젠가 자신도 겪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모른 채 막연히 흘려보냈던 시절을, 애써 덮어두고 잊어버리려 했던 상처를, 사랑하는 이에게도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욕망을 작가가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해냈을 때 그걸 좋다고 느끼는 거죠. 경험적으로 이미 아는 건데 언어로는 미처 몰랐던 것을 선명한 인지의 단계로 끌어올려주는 글. 그래서 텍스트를 경유해 타자 혹은 세계와 연결되는 듯한 감각을,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을 좋아하는 거죠.”(109쪽) 이 사회적 무대는 발화 의지를 갖춘 이라면 누구나 마이크를 쥘 수 있다고 말한다. 주어진 기회에 불구하고 침묵하는 건 너희들이 저지른 일탈과 방종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덧붙이며 말이다. 물론 우리는 발화 여부가 곧 행위의 윤리성을 결정짓지 않으며 이러한 상관관계를 호도하는 것이야말로 혐오 세력이 즐겨 쓰는 수법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을 에워싸는 담론적 모욕과 혐오 속 이른바 ‘진실을 안다’는 것만으로 내 삶은 ‘살 만한 것’이 될 수 없다.11) 진실을 성문화하는 법과 제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앞서 자신과 같은 불안과 죄책감을 겪어온 이들의 경험과 증언이 필요하다. 여전히 언어화될 수 없는,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경험들을 통약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쓴다.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인 이야기. 나만 입다물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므로 쓴다.”(157쪽)

박선우는 ‘글쓰기’가 현실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 있다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현실은커녕 당장에 내 옆에 있는 ‘엄마’도 바꿀 수 없는 게 바로 ‘나’가 하는 ‘글쓰기’이지 않은가. ‘엄마’와 보내온 시간을 다각도에서 회고한대도 ‘나’는 끝내 그 무엇도 확언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무지와 무력의 순간들을 견뎌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만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과연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나’ 역시 ‘엄마’에게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사랑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며 ‘나’의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방식은 아버지의 죽음을 침묵으로 애도하는 ‘엄마’의 방식과는 분명 구별되는 것이다. ‘나’가 ‘엄마’를 견디는 만큼 ‘엄마’ 역시 ‘나’를 견디고 있다고 할 때, 이 무지와 무력의 순간은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애적 규범이 사회적 정상성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동등한 관계 따위는 없다. 무지와 무력함은 비규범적 존재를 향한 [교정] 치료와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오늘날 소수자 권리 운동이 ‘잘 아는’ 전문가와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를 구도로 한 대리전의 양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편,12) 무지와 무력함을 써내려가기 위해 자신이 지닌 인식론적 특권을 행사하는 모습은 가히 대담하기까지 하다.

오늘날 사랑의 세계는 낭만적이지도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다. 사랑에 허우적대는 이들을 보며 청춘의 호시절이라며 그저 남부러워하기에 숱한 혐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이름을 자주 목격한다. 소설이 남긴 것은 ‘어쩌면’, ‘혹시’, ‘만약’으로 일컬어지는 망설임과 불확실한 느낌투성이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로부터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받아들”(「겨울의 끝」, 101쪽)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앎을 추구하기보다 서로에 대해 모른대도 우리는 여전히 손을 맞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지극한 서사에 대해 퀴어하다고 아니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속는 셈 치고 하루만, 오늘 하루만 더, 하면서”(221쪽)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이 모습은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각주
1) 이 글은 박선우의 소설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자음과 모음, 2020), 『햇빛 기다리기』(문학동네, 2022)와 단편소설 「사랑의 방학」이 수록된 『서로의 계절에 잠시』(큐큐, 2023), 『어둠 뚫기』(문학동네, 2025)가 그것이다. 본문에서 인용 시 각각의 제목과 소설집 내 쪽수만 밝힌다.

2) 사랑은 친밀한 이들의 ‘얼굴’을 앞세운 채 우리를 다양한 사회적 연관들로부터 떼어놓는다. 예컨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은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되거나 엄마의 모자란 이해심을 겨냥할 뿐이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론적인 수준에서 사회 구조적 한계를 폭로하는 데 재전유될지는 몰라도 당장에는 친밀한 이들을 향한 ‘배신’ 혹은 ‘배반’의 행위로 간주된다. -박상현, 「주디스 버틀러의 권력론에서 정동적 가능성 혹은 한계」, 《비교문화연구》 76, 2025, 49-79쪽.

3) 다음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정희연, ‘아이유, 신곡 제목 ‘Love wins all’로 변경 “혐오 없는 세상 바라”’, <스포츠동아>, 2024. 1. 19. https://sports.donga.com/article/all/20240119/123137125/1

4) 박상수, 「웃고 사랑하고 일상을 살고」, 『햇빛 기다리기』(2022) 해설. 260-264쪽.

5) 퀴어한 정체성과 ‘퀴어한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규범과 비규범, 저항과 동화의 범박한 대립에서 벗어나 이른바 비규범적인 몸으로 ‘보통 시민’의 삶을 좇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 -정민우, 「퀴어 이론, 슬픈 모국어」, 《문화와 사회》 13, 2012, 53-100쪽;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허원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4; Love, H. Feeling Backwar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6) 신샛별, 「구원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만이 신을 알려고 노력하듯,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곳에서』(2020) 해설. 235-236쪽.

7) 진태원, 「을의 정치적 존재론」, 《글로컬 어문학 문화 연구》 11, 2022, 53-95쪽.

8) 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202-207쪽.

9) 릴리 출리아라키,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성원 옮김, 은행나무, 2025, 23-37쪽.

10) 오혜진, 「오염과 감염의 두려움 없이, 지극하고 서늘하게」, 《문학과 사회》 33(3), 2020, 350-354쪽.

11) 버틀러는 존재하는 모든 삶이 그 자체로 ‘살 만한 것(livable)’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의 손실에 대해서는 높은 사회적 관심과 필요한 각종 조치가 뒤따르는 한편, 다른 어떤 이의 손실은 가시화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 실재 여부조차 의심을 받는다. 요컨대 어떠한 삶이 ‘살 만한(livable)’하다는 것은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층위에서 그 삶이 응당 보호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살 만한 삶’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12) 당사자의 주권을 중심으로 한 운동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 -김경희, 「서발턴 연구에서 ‘재현’의 문제와 지식인의 역할-일본의 당사자성 문제에 주목하여」, 《일어일문학연구》 122, 2022, 217-238.

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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