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가난하고 혼란했던 울산의 주춧돌 ‘사람과 인심’

고은정 기자 2026. 1. 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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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말띠 예술 원로들이 들려주는 ‘울산, 그때 그 시절’]
(상) 한 시대의 시작, 그리고 울산의 변곡점

대담자: 박종해 울산예총 고문(문학), 서진길 울산예총 고문(사진), 황우춘 울산예술고 이사장(음악·교육)

"태어나자마자 해방과 6·25를 겪었고, 4·19와 5·16을 지나 스무 살 무렵에는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됐죠. 장년이 돼서는 광역시로 승격했고, 이제는 'AI 수도'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 임오생이 품고 있는 기억 자체가 울산의, 그리고 우리나라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왔고, 또 지켜왔습니다."

울산은 격변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빠르게 변모해 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과 산업화를 거쳐 오늘날의 광역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그 시간을 살아온 이들의 기억은 여전히 울산의 뿌리를 이룬다.

본지는 임오년(1942년)생 말띠로 태어나 울산의 문화예술 현장을 지켜온 원로 예술인들의 삶과 기억을 통해, '그때 그 시절' 울산의 모습을 상, 하 두차례에 걸쳐 되짚어본다.

임오년(1942년) 생 말띠로 태어나 울산의 문화예술 현장을 지켜온 원로 예술인들. 왼쪽부터 황우춘 울산예술고 이사장(음악·교육), 박종해 울산예총 고문(문학), 서진길 울산예총 고문(사진). 최지원기자
△울산에서 나고 자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나요?

박: 4살 때 해방이 됐죠. 제가 사는 곳이 송정동이었는데 어른들이 큰길가로 태극기를 들고 나가면서 일본 차에 돌을 던졌어요. 따라가서 이유도 모르고 함께 돌을 던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저는 농소에 살았기 때문에 호계쪽으로 매일 군용차가 지나가는 것을 봤어요.150평 되는 고가에 살았는데, 거기에 피난민들이 꽉 차 집 안에 30가구 정도 약 100명이 함께 살았습니다.매일 김치가 한 동이 나가고, 뒷밭에 콩잎까지 다 따먹고, 매일 그 양식을 댄다고 애를 먹었습니다. 가족들이 죽을 지경이었어요. 나도 밥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콩나물 갱죽이라고 해서 콩나물하고 밥하고 섞어 먹고, 바다의 곰피나 산의 송진을 잘라 밥에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빨갱이들이 동대산에서 내려와 "야 임마 쌀 가지고 와" 이러거든요. 낮이 되면 경찰이 와서 "밤 손님 안 왔소?"라고 하고요. 동네에 '삼만이'형제라고 있었는데 쌍둥이인 선만이와 후만이와 삼만이 형제였어요. 6·25 때 삼 형제가 군대에 가서 다 죽었어요. 어머님이 밤마다 울면서 아들을 불러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했어요.

황: 초등학교 1, 2학년 때인가 운동장에서 열심히 놀고 있는데 폭격기가 북쪽으로 떼를 지어서 날아가는 걸 봤어요. 소리가 너무 컸기에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50년대 말쯤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갔는데 지금 복산초등학교와 울산고등학교 사이 골짜기였습니다. 조금 위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었고 더 산기슭에는 화장 막이 있었습니다. 공설운동장 둑 위 판잣집 교실에서 공부했는데 흐리고 바람이 불면 화장 막 굴뚝에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매캐한 냄새가 났어요.

당시는 울산농업중학교, 울산 농공고등학교가 육군 병원이었습니다. 피난민이 막 쏟아지니까 교실이 환자 수용소가 됐거든요.학성공원 기와 막에서 공부했고 또 나무에다가 흙판(칠판)을 걸어놓고 공부를 했어요, 우리나라가 경제 강국이 된 것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교육의 끈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서: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어요. 당시에 선생님을 따라 산전샘 위 성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어요. 유엔군이 지프를 타고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포항 전투가 일어나 위험한 상황임에도 유엔군은 우리가 태극기를 흔드니 손을 흔들고 웃어준 것이었어요.

서진길작 '성남동 오일장' (1960년)
△그때 그 시절, 울산 사람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이었나요?

박: 뭐니 뭐니해도 추석, 설 명절이죠. 차례를 지내고 난 뒤에 씨름이 펼쳐졌어요.동천강 모래밭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어요. '소태'라는 장군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 기출이를 얕잡아 보다가 첫판에 졌어요. 둘째 판에서는 '소태'가 정신을 바짝 차려 '기출'이를 가랑잎처럼 가볍게 던져 버렸죠. 참 재미있었어요. 또 우리 동네 약 50호가 전부 밀양박씨였는데 집마다 세배가서 술 마시고, 윷놀이하고, 노래자랑을 하던 추억도 생각나요.

동천강에서 은어를 잡아먹고, 장날 국밥 한 그릇 얻어먹는 것이 그때는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죠. 또 들판에서 무 뽑아 먹고, 고구마 캐 먹고, 그런 재미있는 그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황: 초등학교 다닐 때는 소를 먹였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책가방을 방 안에 집어 던지고 소를 몰고 산에 소 풀을 먹이러 갑니다.소고삐를 뿔에다가 칭칭 감아놓고 가재를 잡습니다. 산골짜기에 맑은 물에 고디를 잡아서 집에서 몰래 된장, 쌀을 갖고 와 바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가재, 고디를 넣고 된장을 보글보글 끓여 먹었어요. 초등학생이지만 지혜가 있었어요. 냄비에 돌을 얹어 밥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고 젓가락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빙 둘러앉아서 먹던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서: 당시 울산에서 소통과 만남의 장소로 통하던 곳이 성남동 오일장이었는데요. 경주, 밀양, 양산 등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와서 그 안에는 정치, 경제, 문화, 상업이 모든 것이 공존했어요.당시에는 전화기가 없으니까 거기서 사람을 만나고 안부도 물었죠. 사돈도 만나고, 딸도 만나고, 아들도 만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모습들이 성남동 오일장 시장에 있었고, 그곳에서 문화의 꽃을 피웠어요, 그때 가설극장도 있었고요. 약장사 앞에서 넋을 잃고 서서 하루 종일 집에 갈 줄 모르고 손뼉을 치고 울고 웃던 '문화'가 있었습니다.

서진길작 베밀래기(1979년)
△울산 하면 태화강이죠. 태화강에 얽힌 재미있는 추억도 많을 것 같습니다.

서: 선바위 부근 구영리에 살았는데 들판으로, 강가로 돌아다녔어요. 태화강에는 봄에 황어가 떼로 몰려오는데 선바위까지 그 고기가 올라가요. 가을에는 연어가 올라왔어요.

또 그때는 목욕탕이 별도로 있는 시절이 아니니까 태화강에 가서 예쁜 자갈을 주워 때를 밀었어요. 물가에서 빨갛게 피멍이 들 정도로 씻고 명절을 맞이했어요. 납작한 돌을 주워 물새 날아가듯이 물 위로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건 기억도 새록새록 합니다.

문수산 넘어가면 뭐가 있는지 모르는 시절이었어요. 그 시절이 생각나면 "물새야 왜 우느냐 유수 같은 세월을 원망 말어라"라는 가사의 노래를 지금도 부르곤 합니다.

지금 사라졌지만, 명촌교 아래쪽에 '대도섬'이라는 다이아몬드 같은 예쁜 섬이 있었어요. 거기서 멱 감고 바지락도 잡았어요.

근처 둑에 가면 구멍이 송송 나 있었어요. 게가 나와 놀다가 사람이 가면 놀래 구멍으로 막 들어가요. 명촌교 아래쪽에 바지락이 많이 나오고 백합이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전국적으로 유명한 백합이어서 알맹이는 우리가 먹을 수는 없지만 껍질에 있는 무늬가 그야말로 산수화 이상으로 아름다워 백합 조개껍질 주우러 다녔어요. 집에 와서 쫙 늘어놓고는 아버지한테 야단도 맞기도 했죠.

황:그때 조개 잡는 방법은 발꿈치로 모래사장 아래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면 돌 같은 것이 채이는데 그건 돌이 아니고 조개였어요.태화강에서 여름에 멱 감다가 여자들이 멱을 감는 걸 알고는 상류에 가서 보리 껍질을 물에 뿌립니다. 보리 껍질이 얼마나 까끄럽습니까? 그러면 여자들이 화를 내고 우리는 도망가곤 했죠. 좀 전 말씀하신 용금소 바로 옆에는 지금 태화루 쪽에 거룻배가 있었습니다. 강 건너로 연결해서 저쪽에 사람이 타고 와야 우리가 건너갈 수 있었어요.

철없던 총각 시절, 캄캄한 밤에 쌀 포대를 준비해서 외(참외)서리를 갑니다. 울산 농업중학교, 울산고아원이 있었고 그 외에는 전부 다 밭입니다. 주인 몰래 서리를 했어요.단체로 가서 외, 수박을 잔뜩 따서 매고 주인한테 들킬까 싶어서 밝은 곳에 와서 펼쳐보면 전부 다 아직 안 익었어요. 얼마나 죄책감이 들던지요.

박: 태화강, 방어진 강가에 앉아서 얘기하고 소곤소곤 속삭이던 그런 시절이 참 그리워요.

고등학교 때 여학생들이 여름에 과수원에 가서 배 봉지를 채우고 돈을 좀 벌었어요.그럼, 우리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술 한잔 사달라 해서 먹곤 했던 기억이 있는데 참한 여학생을 만나 방어진 울기등대가 있는 일산진에 갔어요. 거기에 아무것도 없고 조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5원인가를 주고 우동을 사 먹었어요. 그때는 그것도 아무나 못 사 먹었어요.

요즘 젊은이들 보면 갈 데 많고 좋은 시절에 살고 있어요. 부럽지만 그래도 그때 추억이 좋습니다.

△당시 우리 울산을 지켰던 울산의 어른들이 많았지요?

서: 비교적 저는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 울산에 있는 어른들을 많이 뵀거든요. 찾아가고 심부름도 해서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고기업 씨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사회에 기여를 많이 했어요. 태화극장, 천도극장을 운영하면서 영화를 통해 계몽 운동도 많이 하고 문화분야에 기여를 많이 했지요.이봉섭 씨라는 어른도 계셨는데 고아원 원장이었죠. 6.25 때 내려온 부모 없는 아이들을 키워 당신 자식같이 사회에 진출시킨 큰 어른이었죠. 부인인 이옥주여사도 여성사회운동가 제1호라 할 수 있어요.3.15 기념 행사를 할 때 배철수라는 큰 어른이 왔어요. 그런데 3.1운동 선언문을 책도 안 보고 낭독을 할 만큼 열정적인 운동가였어요. 늘 한복을 입고 성남동, 옥교동 거리를 늘 왔다 갔다 하면서 울산을 지켰어요.

그 뒤에 1960년대 말 윤희준이라는 초대 경남도의원도 있었는데, 이분은 국제 신사였어요. 카메라맨들이 촬영을 하고 있는데, 이분도 직접 촬영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건축 전문가로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 해외 문물을 많이 접한 울산의 국제 신사였어요.현재 우리는 이렇게 발전한 울산에서 살고 있으면서 울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반성을 하면 이 어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기사는 울산매일 인터넷방송 UTV를 통해 생생한 영상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