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희망을 싣고 달린다"…병오년 새해 첫차 타는 시민들

박건우 기자 2026. 1. 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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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KTX·버스·지하철 올라
각자의 삶을 안고 오른 대중교통
묵묵하지만 힘찬 하루의 출발 알려
"안정된 사회와 가족의 평안을 소망"
아직 동이 트지 않은 2026년 병오년(丙午年) 1일 새벽, 도시는 잠든 듯 고요했지만 광주의 하루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영하권의 찬 공기 속에서도 새해 첫날 지하철·버스·KTX 첫차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다짐을 안은 시민들이 몸을 실었다. 누군가는 생업을 위해, 누군가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새로운 한 해의 출발선에 서기 위해 어둠을 뚫고 길을 나섰다. 새해 첫날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는 듯 이들은 오늘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 평범한 발걸음 속에는 한 해를 살아낼 각오와 소망이 담겨 있었다. 남도일보는 새해 첫날, 광주의 새벽을 가로지른 첫차에 오른 지역민들의 이야기와 희망을 담았다.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아진 가운데 1일 오전 4시 56분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부산과 인천공항행 고속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박건우 기자

이날 오전 4시 40분께 광주종합버스터미널은 새해 첫날 이른 시간이라는 점을 실감케 하듯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드문드문 모여 선 사람들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 흩어졌다. 그러나 정적 속에서도 새해를 여는 발걸음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고속버스 승강장 앞에서는 황재욱·이양심(60) 부부가 두 딸과 함께 인천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외투 깃을 여며주며 짐을 챙기는 손길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가족의 익숙함이 묻어났다. 환갑을 맞아 훗카이도로 떠나는 가족여행길이다. 황 씨는 "이제는 바라는 게 많지 않다"며 "매년 이렇게 가족이 건강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담담히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이 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같은 시각 터미널 한 켠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벽 4시 30분께 서울에서 광주에 도착한 황민준(23) 씨는 시내버스 첫차 시간이 되기까지 대합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배낭 하나를 곁에 둔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그는 간간이 출입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봤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황 씨는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 길이라 괜히 마음이 들뜬다"며 "가족 얼굴을 보고 나면 다시 힘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취업 준비도 차분히 해가며, 스스로 조금은 단단해지는 2026년을 보내고 싶다"고 새해 다짐을 전했다.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아진 가운데 1일 오전 5시 10분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첫차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 모습. /박건우 기자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 첫차 운행을 앞둔 버스들이 차례로 도착해 줄지어 섰고, 어둠을 가르며 켜진 전조등 불빛이 정류장을 밝혔다. 운전기사들은 차량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무전기로 노선과 운행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하루를 준비했다. 대부분의 노선은 오전 5시 40분 출발을 알렸다.

정류장에는 출근 가방을 멘 직장인과 간단한 짐을 든 승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전광판에 표시된 노선 번호와 도착 예정 시간을 번갈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새해 첫날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의 풍경이었지만, 그 시작이 유난히 이른 새벽이라는 점만이 달랐다.

정류장 한켠에 가장 먼저 서 있던 일본인 야스코(65) 씨는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버스 도착 안내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인들과 함께 새해 기도 봉사를 마친 뒤 화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30년이 됐다는 그는 "이제는 이곳이 제 삶의 터전"이라며 "새해에는 모두가 조금 더 평안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의 문이 열리자 승객들은 짧은 인사도 없이 차에 올랐다. 정류장은 다시 한동안 조용해졌지만, 곧 또 다른 노선을 기다리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렇게 새해 첫날의 아침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직장인 김준(30)씨는 "새해 첫날이지만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섰다"며 "큰 바람보다는 무탈한 한 해를 보내는 게 목표이다"고 말했다.
 
'호남권 최대 관문' 광주송정역도 새벽 5시 30분께 첫 차를 탑승하려는 승객들로 비교적 분주했다.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

비슷한 시간 '호남권 최대 관문' 광주송정역도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이날 첫 차는 오전 5시37분 서울 용산행 KTX. 동이 트지 않아 어둑한 시간임에도 수십여 명의 승객들은 기차표와 열차를 번갈아 쳐다보며 본인의 탑승구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영하 6도의 살얼음 같은 날씨 속 패딩과 장갑, 목도리 등으로 중무장한 채였다.

서울 소재 대학생 최영수(26)씨도 그 중 한명이었다. 최 씨는 지난달 30일 고향인 광주에 잠시 내려왔다가 이날 다시 상경길에 오른다. 공모전 준비, 자격증 취득으로 바쁜 와중 찰나의 '짬'을 내서였다고 한다. 최 씨는 "한 해의 마지막은 부모님과 보내는게 맞겠다 싶어 이틀간 광주에 머물렀었다"며 "너무 일찍 올라가니 어머니가 특히 서운해하셨지만, 올해는 꼭 취업해 용돈이라도 쥐어드리고 싶다"고 다짐했다.

정태춘(67)·임현희(61·여) 부부는 새해 첫 날 서울로 '효도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 예약해준 고급호텔에 숙박하며 2박3일 머무를 예정이다. 정 씨는 "온 가족 여행이 아니라 아쉽지만 올해 안녕을 기원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박물관도 둘러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임 씨는 "몇 십년만의 부부여행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지하철 첫차가 도착한 오전 5시 무렵, 광주 동구 소태역 플랫폼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

지하철 첫차가 도착한 오전 5시 무렵, 광주 동구 소태역 플랫폼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개찰구를 통과한 승객들은 안내 방송이 울리자 서둘러 전동차에 올랐다.

좌석에 몸을 기댄 채 미처 이루지 못한 잠을 청하는 이들, 휴대전화로 오늘 일정을 확인하는 이들의 모습이 교차했다. 새해 첫날이지만 지하철 안 풍경은 여느 평일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동산단에서 근무하는 박모(41)씨는 새해 첫날도 일터로 향했다. 쉬는 날이라 크게 바쁠 일은 없겠지만 가족과 새해 첫 아침을 맞지 못하는 것은 다소 아쉽다고 한다. 그럼에도 "다가올 설날 명절 전 5살배기 딸과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그 약속을 버팀목 삼아 열심히 일하겠다"며 미소지었다.

박인자(54·여) 씨는 광산구에 사는 친구를 보러간다. 오후부턴 각자 가족들을 챙겨야 하니 오전에 잠시 찻집을 가기로 했다. 박 씨는 "해가 갈수록 바쁘고 삭막하니 지인들 볼 시간도 없다"며 "새해에는 모두가 따뜻한 순간들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건우 기자·임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