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스트] 경제 재도약 출발점 '질서와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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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25년 대기업의 59%가 투자 계획 '없음' 또는 '미정'으로 응답했고,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는 64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반대로 질서가 바로 서고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면 정책의 효과는 분명히 달라진다.
질서와 신뢰, 정책과 투자, 성장과 분배가 맞물리는 선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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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시스템 정상 작동 막아
기업 투자 살려 선순환하려면
정책 불확실성부터 해소해야

한국 경제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25년 대기업의 59%가 투자 계획 '없음' 또는 '미정'으로 응답했고, 경제정책 불확실성 지수는 64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투자 위축과 정책 불확실성 증가는 경기 둔화 국면에서 반복돼온 현상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경기순환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 전반에 누적된 질서 약화와 신뢰 붕괴가 경제 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제도와 신뢰를 전제로 움직인다.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된다는 확신과 정책이 예측 가능하다는 기대가 없다면 투자와 혁신은 작동하기 어렵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기초질서의 해이는 이러한 신뢰 붕괴의 단면이다. 도로 위에서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는 차량이 늘고, '켜봐야 손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공유된다. 권위와 타인에 대한 존중은 약화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지기보다 '누가 우리 편인가'를 먼저 따지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애시 효과(asch effect), 즉 다수가 따르는 행동에 개인이 동조하는 집단 행동의 결과에 가깝다.
문제는 이러한 동조 현상이 일상 규범을 넘어 법과 제도 전반에 대한 인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법은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으로, 제도는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 '유리하게 활용하거나 무력화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를 본다는 학습이 반복될수록 법에 대한 존중은 약화되고 사회적 신뢰는 빠르게 소진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어떤 정책도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규제가 발표되면 이를 어떻게 준수할지보다 어떻게 우회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계산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관련 법규의 해석이나 집행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때마다 기업들은 투자를 멈추고 관망에 들어간다. 정부가 아무리 정책 의도를 설명해도 시장은 '이번 정책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정책 발표가 확신의 신호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출발점으로 인식되는 순간, 투자는 자연히 뒤로 밀린다. 기업이 규제의 강도보다 예측 가능성을 더 중시하는 이유다.
반대로 질서가 바로 서고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면 정책의 효과는 분명히 달라진다. 규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정책 변경이 사전에 예고되며 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될 때 시장은 정책을 비용이 아니라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세계경제포럼이 신뢰를 '건강한 사회를 지탱하는 접착제'로 정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 신뢰가 높은 국가는 부패 수준이 낮고 정책 집행 비용이 적으며, 기업은 불확실성 관리보다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수 있다.
정책에 대한 신뢰는 곧 기업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예측 가능한 제도 환경에서는 기업이 단기 실적보다 장기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 글로벌 시장 개척은 이러한 환경에서 가능해진다. 그 결과 고용과 생산성이 개선되고, 늘어난 세수는 다시 공공서비스와 사회적 안전망 확대로 환원된다. 질서와 신뢰, 정책과 투자, 성장과 분배가 맞물리는 선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중요한 것은 질서와 신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가적인 기술이나 자본 이전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를 다시 세우겠다는 집단적 의지와 성숙한 문화다. 질서에서 출발해 신뢰를 축적하고, 투명한 정책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한국 경제 재도약의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로다.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경영학회 차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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