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헛살았다

안승현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문화산업본부장 2025. 12. 3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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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삽이 쉽사리 흙을 지르질 못한다. 삽날이 튕겨 나온다. 땅의 저항이 손목으로 전해진다. 좀 더 힘을 주어 삽자루를 쥐고 일격을 가한다. 팔꿈치를 움켜쥔다. 치료를 중단한 팔꿈치에 찌릿찌릿 통증이 심하다. 오지게 움켜쥐었던 손이 삽자루를 놓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푹했던 날씨가 하룻밤 사이 땅을 설국의 철옹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몇 번 더 시도 끝에 커다란 덩어리를 들춰냈다. 반 뼘도 안 되는 두께인데 애를 먹였다. 그다음은 제법 보슬보슬한 흙이어서 쉽게 팠다. 한 번 판 김에 깊게 파기로 했다. 겨우내 나오는 채소부산물을 흙과 섞어 잘 발효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몇 번 잘 나가던 삽질이 멈췄다. 또 하나의 걸림이 생겼다. 뽀얀 뿌리였다. 몇 해 전 심은 팽나무의 뿌리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삽질 하는데 까지 가지가 뻗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뻗어 있을 줄, 땅을 파면서 알게 되었다.

가지가 사방으로 뻗었다. 하늘을 향해, 뒷집을 향해, 길가를 향해, 학교를 향해, 옥상을 향해, 똥을 갈기고 잽싸게 자리를 뜨는 직박구리를 향해, 하얀 구름을 품어내며 내빼는 비행기를 향해 뻗쳐있다. 커다란 기둥에 연결된 무수히 많은 가지들이 살을 빼고 길이를 줄이며 사방으로 뻗어있다. 나름 왕성했던 지난 여름날의 모습을 땅을 파면서, 잎을 모조리 벋은 후에 알게 되었다.

팽나무는 나이테를 더해가며 미래를 생각했나보다. 한 해 한 해 반복되는 계절은 점점 더해지는 정교함이었을 것이다. 땅위로 가지를 뻗어나가며 세분화된 전략으로 분산투자를 했을 것이고, 땅 속에서도 어쩌면 모조리 베어질 위기를 대응하면서 가지보다 더 촘촘하게 뿌리를 키워 나갔을지 모를 일이다. 밝은 곳, 어두운 곳을 가리지 않고, 그 어느 곳에 부등호를 긋지 않고 균형감 있게 세계를 확장했던 듯하다. 어디든 가보고 싶어 하는 만큼 조건을 따지지 않고 뻗고 있었던 듯하다. 나이를 먹어가며 더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지는 확장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매번 반복되는 물을 올리고 싹을 틔우고 햇볕을 받아들이고 몸집을 키우면서 세상 어디, 그 무엇이 가로 막을 수 있을까 도전하는 힘이 빽빽한 가지, 물이 통통하게 오른 뿌리가 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새들을 맞이하고 쓸쓸함을 달랠 것 같은 일은 없었다. 진정성 있게 맞이하고 모조리 내주었지만 찾지 않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앙상하고 남루할 것 같은 측은한 마음은 애당초 쓸데없는 짓이다. 한자리에 자리 잡고, 세상 어디든 무엇이든 알고 싶은 호기심에 확장하는 가지와 뿌리를 제어할 수 없다. 허영 없이, 속을 드러내지 않고 더욱 안으로 감춘 결과일 듯하다. 말하고 싶은,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 꽃을 화려 하게 피운 적 없다. 꽃을 피우려 했지만 어쩌면 꺾이고 잘리는 아픔을 겪었던 과거를 안고 있었듯 하다. 그래서 조용히 아주 작은 꽃을 피우고,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를 단다. 어렸던 나에게 총알을 내 주었던 군수품 지급처였다. 더한 것은 과한 것이기에 족한 줄 알고, 들고 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낮달이 가지 끝에 달려있다. 허공에 정교하게 그려낸 가지 끝, 또렷하게 깔끔하게 다듬은 빛 하나 걸렸다.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가녀린 딱새 수컷이 앉기에 버거운 가지 끝을 선택했다. 가지가 낮달을 애타게 찾았던 듯, 용해로에서 막 떠낸 유리액체를 긴 시간 다듬고 서냉가마에서 완전히 식은 유리 한 조각으로 갈무리 했다. 수도 없이 했을 챔질의 결과인지, 한 번도 시도 하지 않았는데 우연찮게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을 더해가며 가지의 방향이나 끝은 점점 더 정교해 지고 있다.

조상 대대로 살던 터무니 있는, 냉장고에 들어갈 일 없는, 푸성귀를 키울만한 텃밭이 있는, 한 겨울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우물이 있는, 오래전 개발에 베어진 둥구나무가 있는, 매년 원 없이 내주는 감나무가 있는, 그 안에 올 한해 헛산 것 같은 사람의 의미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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