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대 국회의원 인터뷰

유지웅 기자 2025. 12. 3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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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에서 싸워온 박찬대… 이번엔 인천 민심 사로잡을까

더불어민주당 박찬대(인천 연수갑) 국회의원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3선 정치인이다. 회계사로서 전문성을 쌓은 뒤 정치에 입문한 그는 중앙과 지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공천 배제와 낙선을 겪는 수많은 굴곡에서도 지역을 떠나지 않고 결국 2016년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뒤 지난해 총선까지 내리 3선을 달성했다. 험지로 분류되던 연수지역구를 지켜낸 집요함은 박찬대를 '지역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각인시켰다.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치 동행은 그의 위상을 중앙 무대로 끌어올렸다. 대선 과정에서 수석 대변인과 비서실장을 맡았고 이후 당 최고 위원과 원내대표를 거치며 당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았다. 비상계엄 국면과 탄핵 정국을 관통하며 당 지도부 중심에 섰다는 평가가 따른다. 

3선 국회의원이자 원내대표를 지낸 박찬대는 다시 인천을 향하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내년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찬대를 유력한 차기 인천시장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하고 있다.<편집자 주>

기호일보와 인터뷰 중인 박찬대 의원./유지웅 기자
# 인천 뿌리 정치인

박찬대 의원에게 인천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삶의 출발점이다. 그의 부모는 조상 대대로 안동에 뿌리를 둔 집안 출신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삶의 터전을 잃었다. '해불양수(海不讓水)'의 도시 인천으로 향한 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부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먼저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모친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정착한 곳이 미추홀구 용현동이다. 박 의원은 부모가 인천에 뿌리를 내린 뒤 태어난 말 그대로 '인천에서 시작된 삶'을 살았다. 부모 모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이었지만 자식 교육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집안의 계보는 화려했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외가와 친가 모두 안동 지역에서는 이름난 가문에 속했다. 외가는 임청각을 중심으로 한 집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과 같은 혈통이다. 친가는 안동 박씨 명문으로 꼽히던 가계였으나 전쟁과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33년생인 부친은 6·25전쟁 이후 미군 부대를 따라 인천에 이르렀고 현재의 인하대학교 일대 판자촌에 정착했다.

박 의원은 용현초등학교와 대건중학교, 동인천고등학교를 거쳐 1984년 인하대학교에 입학했다. 안동의 뿌리와 인천의 현실이 교차한 성장 과정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됐다. 

정치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 입성에 도전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출마 기회가 무산됐다. 

이후 절치부심 끝에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민주 계열 후보 누구도 당선자를 내지 못한 인천 연수 갑에 출마해 보수의 맥을 끊고 당선됐다. 그리고 2020년 제21대 총선과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도 연이어 승리하며 3선 의원이 됐다. 공천 배제와 정치적 부침을 겪었지만 박 의원은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인천에 머물며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 '지역을 지킨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2026년 6월 3일 예정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박찬대를 인천시장 후보군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 순탄하지 않던 정치 비포장도로

박찬대 의원은 정치권에서는 드문 회계사 출신 경제 전문가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회계법인으로 꼽히는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국내 멤버펌이던 세동회계법인 국제부에서 회계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와 쿠퍼스앤라이브랜드의 합병으로 PwC 체제가 출범하면서, 멤버펌이 삼일회계법인으로 재편됐고, 박 의원은 스카우트 형태로 삼일회계법인에 합류했다.

삼일회계법인 재직 시절 미국 연수를 통해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배우자는 금융감독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박 의원은 개업을 거쳐 한미회계법인을 창업했다. 

서울 강남 도곡동과 포스코사거리에 본점을 두고 최대 주주로 회계법인을 운영했고 인천과의 연고를 계기로 부평에 지점을 개설해 지역 활동도 병행했다. 그는 약 20년간 회계사로 활동하며 기업·금융 현장을 두루 경험했다.

정치로 방향을 튼 계기는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박 의원은 같은 달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한 뒤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경제인으로서 살아왔지만 진정한 시민으로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고 회고한다.

이후 인천 부평을 중심으로 인문학 공부 모임과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인천사랑과문화' 창립에 관여했고,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에서 사무차장과 사무처장을 맡으며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10년 말. 당시 민주당 손학규 대표로부터 정치 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정치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고사했다.

전환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안철수 당시 원장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박원순 후보가 시민의 힘으로 당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정치 참여에 대한 결심이 굳어졌다.

같은 해 '희망코리아' 공부 모임에 참여하며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를 넓혔고 시민운동을 넘어 제도권 정치로 나아가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정당 선택 과정에서도 고민이 뒤따랐다. 시민사회 인사들로부터 정의당 참여 제안을 받았지, 박 의원은 '실용성과 집권 능력'을 이유로 민주당을 택했다.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 과정에서 입당했고 지역구는 정치권에서 기피 지역으로 꼽히던 인천 남구 을(미추홀구)을 선택했다.

정치 입문은 순탄하지 않았다. 2012년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탈락했다. 당의 여성 우선 공천 원칙에 따라 안귀옥 변호사가 전략적으로 지역구를 이동 배치받으면서 출마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다.

입당 두 달 만에 첫 총선 도전이 좌절된 셈이다. 이후에도 지역위원장 선임 과정 등에서 잇따라 배제되며 정치적 시험대를 거쳤다.

박 의원은 이 과정에서도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조직과 지역 활동을 이어가며 재도전을 준비했고,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인천 연수구갑으로 출마해 드디어 국회의원 당선에 성공했다. 

기호일보와 인터뷰 중인 박찬대 의원. /유지웅 기자
# 안동의 뿌리… 이재명과의 인연이 시작되다

박찬대 의원은 안동 태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 뿌리는 안동에 있다. 안동 출신 가계에서 형성된 생활 정서와 가치관은 성장 과정 전반에 깊게 스며 있었다. 

그의 가족은 인천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잡았고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출생지보다 삶의 궤적과 선택이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해온 셈이다.

이 같은 이력은 이재명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두 사람은 모두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했다. 등록금을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고, 사회에 진입한 뒤에는 각각 회계사와 변호사라는 전문직을 통해 자수성가의 길을 걸었다. 

개인적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로 시선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출발선은 닮아 있었다.

박 의원이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시점은 2010년이다. 당시 송영길 후보는 인천시장에, 이재명 후보는 성남시장에 각각 당선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 속에서 인천과 성남 모두 심각한 재정 압박에 놓여 있었다. 성남시장이던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재정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이에 대해 박 의원은 책임감 없는 선택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후 수년간 성남시가 5천억 원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해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평가를 바꾸게 됐다. 위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행정 역량으로 수습해낸 믿을만한 정치인이라는 인식으로 바뀌게 됐다.

두 사람의 첫 대면은 2016년으로 옮겨간다. 박 의원이 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송영길 당시 의원과 함께 판교를 찾으면서다.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 과정을 둘러보고 이를 인천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를 놓고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 이 만남을 계기로 행정과 개발 지역 성장 모델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이 형성됐다.

같은 해 여름, 성남시장이던 이재명은 중앙정부의 지방 재정 통제에 맞서 청년배당과 무상교복 정책을 주장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박 의원은 동료 의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고 이때부터 개인적 신뢰 관계가 쌓이기 시작했다. 

청년배당은 박 의원이 지난 2012년 19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 당에 제안했던 내용이다. 당시 공천심사위원회에서는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방향'을 후보들에게 요구했고, 박 의원은 '청년 기본소득'을 제안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핵심 정책 노선과 맞닿아 있었다.

이 대통령과의 정치적 행보는 2021년에 이뤄졌다. 4·7 서울·부산 보궐선거 참패와 이어진 정국 변화 속에서 박 의원은 기존 정치 구도가 한계에 봉착했다고 판단했다. 

그해 7월 출범한 이재명 대선 캠프에 수석대변인으로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대장동 개발 의혹이 불거진 국면에서는 회계사 출신이라는 전문성을 앞세워 캠프의 핵심 방어 역할을 맡았다. 복잡한 도시개발 구조를 설명하며 각종 토론에서 정치적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동행은 이어졌다. 계양을 보궐선거와 당 대표 러닝메이트, 그리고 원내대표에 이르기까지 박 의원은 이 대통령의 정치 여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원내대표로서 다수 야당을 이끌며 계엄 해제와 탄핵 정국을 거쳐 정권 교체 국면까지 큰 잡음이나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진두지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찬대 원내대표가 제21대 대선에서 승리한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하고 있다. <박찬대 의원실 제공>
# 내란정국에서의 활약

박찬대 의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인 지난해 12·3 비상계엄 국면에서 최전선에 배치된 정치인이다

검찰 수사와 사법 리스크가 당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에서 그는 후방의 전략가가 아니라 전면에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의 정치적 위치는 명확하다.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박찬대는 단순한 원내 실무자가 아니라 당의 위기의식을 언어로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검찰 수사를 '개별 사건'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구조적 문제'로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고,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는 '법치의 외피를 쓴 권력 행사'라는 규정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발언은 종종 수위를 넘나들었지만 당 지도부는 그를 제어하기보다는 전면에 세웠다.

이는 민주당의 전략 선택과 맞닿아 있다. 여야 협치가 사실상 중단된 국면에서 당은 타협형 원내대표보다 전선을 분명히 긋는 인물을 필요로 했다. 

박찬대는 협상 테이블에서 성과를 만드는 정치인이라기보다, 대치 국면에서 진영 결속을 극대화하는 정치인에 가깝다. '내란', '헌정 파괴', '권력 사유화'와 같은 강한 언어가 그의 입을 통해 반복된 이유다.

박 의원은 이 과정에서 정치적 부담을 기꺼이 감수했다. 발언 하나하나가 논란의 중심에 섰고 여권의 반격 역시 그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이 같은 역할 수행은 오히려 친이재명계 내부에서 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이재명 대표를 직접 방어하기보다는, 대표가 서 있는 정치적 공간 전체를 방어하는 인물로 기능했다. 대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야당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는 구도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박찬대는 선택된 인물이다. 조용히 뒤에서 계산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전선에 서서 공격을 감내하는 정치인.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를 '내란적 통치'로 규정하는 순간마다 그 언어의 맨 앞에는 박찬대가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정치 국면에서 민주당의 방패이자 창,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은 화살을 맞는 인물로 남아 있다.

유지웅 기자 yj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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