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밀, 옥수수'를 통해 본 식문화 변화상…'탄수화물 연대기' [전시리뷰]

조혜정 기자 2025. 12. 3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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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대체 곡물로 우리 삶 버티게 한 '보리, 밀, 옥수수'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격변하는 시대만큼 세대별 다른 입맛
내년 3월8일까지 국립농업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 포스터. 국립농업박물관 제공


오늘 하루 먹은 것을 떠올려보자. 밥, 빵, 라면, 과자, 떡…. 대부분 탄수화물, 곡물에서 비롯된 음식들이다. 탄수화물은 생존의 필수적인 영양소로 식사 구성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근 탄수화물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 탓에 안먹고는 살 수 없는 애증의 존재가 됐지만 배고팠던 과거엔 높은 열량을 내는 탄수화물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다.

국립농업박물관이 내년 3월8일까지 개최하는 기획전시 ‘탄수화물 연대기’는 탄수화물을 함유한 곡물 중 보리, 밀, 옥수수를 통해 광복 이후 식문화의 변화상을 살펴보고 세대별로 곡물에 얽힌 기억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윤지은 학예연구사는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은 지난 2023년 개최한 제1회 기획전 ‘농農, 문화가 되다’를 비롯해 여러 전시에서 다각도로 다뤘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쌀을 제외한 제2, 제3의 곡물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자 ‘보리, 밀, 옥수수’를 앞세웠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됐다.

국립농업박물관 기획 전시 ‘탄수화물 연대기’. 조혜정기자


1부 '탄수화물의 어제’는 신석기시대 농사를 시작한 이래 주된 작물로 자리 잡은 보리, 밀, 옥수수를 확보하고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위한 조상들의 필사의 노력을 비춘다.

중국 농서에만 의지하던 것에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끔 지어진 최초의 농업지침서 ‘농사직설’(1429년)에도 보리와 밀에 대한 언급은 있다. 보리의 다른 말인 대맥(大麥)과 그보다 작아 붙여진 밀의 이름 소맥(小麥)에 대해 이 책에서는 “새 곡식과 묵은 곡식 사이의 식량으로 농가에서 가장 긴요한 작물”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수확한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봄철 기근을 나기까지 보리와 밀은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 작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옥수수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의 통역 기관인 사역원에서 편찬한 중국어 학습서 ‘역어유해’(1690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외교와 교역에 필요한 중국어를 익히기 위해 만든 이 책에서 옥수수는 ‘옥을 닮은 수수’라는 뜻의 ‘옥슈슈玉蜀蜀’로 기록돼 있다.

광복 이후 미국의 식량 원조 정책으로 밀이 대량으로 유입된다. 조혜정기자


2부 ‘탄수화물의 대명사들’에서는 지난 100년간 일제강점기, 6·25전쟁, 도시화 및 산업화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으며 바뀌어 온 보리, 밀, 옥수수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정부는 1960~70년대에 들어서며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친다. 윤 학예사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이런 노력이 단순히 장려를 넘어 식문화를 제도화 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보리혼식장려요원증’으로 당시 경기도에서는 각 지역의 통·반장을 혼식 지도 요원으로 임명해 가정과 지역사회 전반에 혼식 실천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또한 1960~70년대 학교에서는 당시 시행된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쌀밥에 보리나 잡곡이 30% 이상 섞여 있지 않으면 벌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농촌진흥청의 ‘봄보리 가꾸기’ 자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재배 시기와 방법을 알기 쉽게 정리한 농업 홍보자료로 품종 선택, 파종 간격, 병충해 관리 등 식량 증산과 자급을 목표로 한 정부의 농업기술 보급 정책을 보여준다.

삼국시대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밀’은 값이 비싸고 귀한 곡물이었다. 윤 학예사는 “정약용 선생은 ‘아언각비’에서 밀가루를 진가루(眞加婁)로 표현할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며 “광복 이후 미국의 식량 원조로 대량의 밀이 유입되고 정부의 분식 정책으로 라면 소비량이 급증하며 친근한 곡물이 됐다”고 설명했다.

1960~70년대 당시 정부는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치기 위해 건전가요, 표어, 포스터 등을 배포한다. 조혜정기자


3부 ‘탄수화물의 오늘과 내일’에서는 광복 이후 식량 증산을 위한 노력과 쌀 생산량 증가 이후 변화된 우리의 식문화를 조명하고 있다.

1973년 당시 내무부, 문교부, 농수산부, 보건사회부 장관은 공동명의로 ‘혼분식에 관한 담화문’을 발행해 ‘밀가루 또는 잡곡 30% 이상을 혼합합시다’ 등 가정과 음식점, 양곡가공업소에서 지켜야 할 지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위반하는 음식판매업자와 양곡가공업자는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1977년 정부가 ‘쌀 주곡 자급’을 공식화 하며 식량 증산에서 품질 향상으로 급변한다. 맛과 품질을 쫓는 식문화가 자리잡고 우리의 ‘밥상’은 단순한 식생활 공간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문화 요소로까지 자리하게 된다.

1984년 월간 ‘식생활’의 창간호 발간사는 이런 변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발간사에서는 “급격한 세계화와 문화적 진보 그리고 풍요로운 오늘날의 생활에 맞춰 단순히 포만감을 느끼는 시가 보다는 영양과 맛을 즐기는 새로운 식생활로 나아가기 위해 잡지를 창간했다”고 밝히고 있다.

윤 학예사는 “관람객이 선호하는 곡물을 직접 선택하고, 다른 관람객들의 결과를 함께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체험 프로그램 통계를 보면 연령대 별 밥·빵 선호율이 확연히 다르다”며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6·25, 현대화와 세계화까지 격변하는 근현대를 겪은 세대가 어우러져 사는만큼음식, 식문화, 선호하는 곡물도 저마다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는 내년 3월8일까지.

조혜정 기자 hjc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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