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많은 자들이 노을 앞에 입을 다물 듯
하나 둘 수평선에 집어등이 꺼지면서
방파제 등대 사이를 조심스레 들어오는
오톤 급 갈치 어선에 아내들도 보인다
어부의 아내들이 어부가 되어버린
바다의 딸이라던 제주의 여인들이
망사리 바다에 두고 고기잡이 하는 걸
깊은 밤 바다살갗이 어쩜 이리 자애로우실까
아까운 것일수록 한팔 간격에 바라보시던
한국의 어버이 같은 그런 가슴이신 걸
까만 밤 불빛 몇 점 수평선을 잃지 않고
절망 한 발 앞에 희망이 기다린다는
수 없는 파도의 언어가 나를 불러 앉힐 때
바다 앞에서라면 부끄러워할게 또 뭐람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바다
계절이 바뀐 날에도 항시 그 모습인 걸
이별이 많은 자들이 노을 앞에 입을 다물 듯
바다 앞에 입을 다무는 침묵의 뿌리는 깊어
나직이 울렁거리다 다시 입을 다물더니
"그 슬픔 그 아픔을 다 어디다 쏟았느냐?"
"웃으며 쏟아내는 시의 바다가 있답니다,
그 속에 더 큰 바다가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 기쁨 뿌듯함을 다 어디다 쏟았느냐?"
"꽃 피면 꽃송이에, 꽃 지면 꽃씨에다
그런 건 아무도 몰래 혼자 누리며 살았지요"
"가끔 왼쪽 뺨을 쓸어내리는 까닭이 뭐지?"
"대상포진 휴유증이 비 날씨엔 되살아나서
독거미 털 다리들이 뺨을 기어 다닙니다"
"짝짝이 양말이라니, 그리 가난하단 말?"
"아무거나 주워 신으며 그냥저냥 산답니다,
남들도 그걸 알고서 못 본 듯이 본답니다"
"떠밀려 온 것들에서 시를 찾고 있다면서?"
"쓰레기 탈을 쓰고 먼 바다를 헤엄쳐 와서
한 편의 시를 전하고 쓰레기가 된답니다."
"세상에 피를 바치고 세상에 뼈를 바치고
바다에 버려진 게 그게 진실이라 했지?"
나보다 더 아는 바다가 심드렁히 묻는다
"이젠 바닷새가 눈길조차 안 준다며?"
"속내 다 들켜버린 새들이나 사람이나
알아도 모른 척하며 본척만척 한답니다."
"실패한 관찰일기 이제 다시 쓴다면서?"
"베란다 아기떡잎이 햇빛 좀 더 달라면서
난쟁이 민들레형제가 바다 안부 묻습니다"
오늘은 화요일이지, 어느 쪽에 출강이야?
"문화포럼 생활시조, 농협 팀의 글쓰기 강좌…"
"어서 가! 내 걱정 말고, 썰물준비 해야 돼"
/2012년 고정국 詩
「바다와의 대작對酌」, 이 장시조에는 <시작노트>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와 함께 잔을 나눴던 '바다'야말로 대양처럼 생각이 넓고 깊으신 독자 분들,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병오년丙午年 새해에 건강과 뿌듯함이 함께하시길.
2025년 세모에 고정국 큰 절 올립니다.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