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기까지 20년…K바이오 축적의 시간, 빛 본다[2026 뉴리더③]
[커버스토리 : 2026 뉴리더]

세계 시가총액 9위 기업을 일군 모리스 창은 50대 후반에 TSMC를 창업했다. 은퇴를 앞둔 나이에 창업 전선에 뛰어든 그는 반도체 분업화를 예견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라는 모델을 제시했고, 시장의 룰을 바꿨다. 창업 전 수십 년간 그가 미국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며 쌓아온 기술력과 산업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 바이오산업에서도 ‘축적의 시간’을 증명해낸 이들이 있다. 글로벌 제약사와 수조원대 ‘빅딜’을 성사시키며 한국 바이오산업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주인공은 박순재 알테오젠 의장(1954년생),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1963년생), 김용주 리가켐바이오 대표(1956년생)다.
이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나이와 경력이다. 젊은 창업 신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LG화학, 글로벌 제약사 등에서 오랫동안 연구개발에 몰두하며 노하우를 쌓은 베테랑들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이 바이오산업의 구조 변화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과로 증명 가능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뤘다. 이전까지 한국 바이오산업은 크게 두 축으로 움직였다.
중견 제약사 중심의 제네릭(복제약) 시장과 대기업 자본이 투입된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CDMO(위탁개발생산) 사업이 주를 이뤘다. 생산 역량은 뛰어났지만 산업 전체를 관통하는 독창적인 원천기술은 늘 갈증의 영역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이 개발해 허가받은 신약은 41개에 불과하다.
K바이오 ‘뉴 리더’인 이들은 자본이나 생산 규모 대신 ‘기술 플랫폼’을 전면에 내세웠다. 한두 개의 후보물질에 사운을 거는 대신 다양한 신약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반 기술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파이프라인이 아닌 기술 자체를 ‘수출 가능한 자산’으로 만들어 정착시키며 글로벌 시장 진입 속도를 높이고 있다.

‘바이오 산실’ LG화학 출신
박순재 알테오젠 의장과 김용주 리가켐바이오 대표는 모두 LG화학(옛 LG생명과학) 출신이다. 1979년 일찍이 바이오산업에 뛰어든 LG그룹은 한국 신약개발의 종가(宗家)이자 ‘바이오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 LG생명과학은 2003년 국산 신약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항생제 팩티브를 개발하는 등 굵직한 이정표를 세우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LG화학을 떠난 연구자들은 각자의 기술 역량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섰다. 이 가운데 10여 곳이 코스닥 상장에 성공하며 LG의 바이오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8년 알테오젠을 설립한 박순재 의장은 연세대 생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대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 박사를 딴 뒤 MIT에서 박사후연구원(포닥)을 거쳤다. 한국에 귀국해서는 25년간 LG화학에서 성장호르몬 치료제 바이오시밀러인 유트로핀 개발을 주도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바이오시밀러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고 해외사업 담당 상무로서 해외시장 흐름과 기술이전까지 두루 경험한 뒤 한화와 바이넥스에서 바이오 경영인으로서의 노하우도 쌓았다.
2008년에는 배우자인 정혜신 한남대 명예교수와 알테오젠을 창업했다. 이미 대기업 임원까지 달며 시장성, 투약 편의성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던 박 대표는 기존 의약품의 효능이나 편의성을 높인 바이오베터(바이오의약품 개량 신약) 개발에 힘썼다.
그가 눈여겨본 시장은 피하주사제였다. 알테오젠의 핵심 플랫폼인 하이브로자임(Hybrozyme)은 기존 정맥주사 의약품을 피하주사 형태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그동안 환자들이 불편하게 병원에 방문해 정맥주사로 맞아야 했던 약물을 집에서도 간단하게 스스로 주사할 수 있다. 이 기술은 매년 ‘빅딜’을 성사시키는 효자 역할을 한다. 지난 3월 아스트라제네카와 2건의 계약을 체결했는데 계약 규모만 2조원에 달한다.
올해부터 원천기술이 글로벌 상용화에 진입하면서 마일스톤(단계적 기술료) 수령 또한 본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글로벌 제약사인 머크(MSD)는 2025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키트루다의 피하주사제형(SC) 제품에 대한 품목 허가를 획득했다. 키트루다는 ‘글로벌 매출 1위 의약품’으로 유명한 MSD의 히트 면역항암제이다. MSD는 알테오젠으로부터 이전받은 기술을 활용해 정맥주사제였던 키트루다를 피하주사제형으로 내놓음으로써 2028년 특허 만료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키트루다 SC가 유럽에서도 허가를 받으면서 알테오젠은 올해 미국과 유럽 품목허가에 따른 마일스톤을 각각 350억, 219억원 수령했다. 특히 앞으로 미국 출시에 따른 연간 로열티 수입이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흑자전환한 회사의 실적이 급성장세에 진입하는 것이다. 알테오젠이 몸집을 불려 코스닥 1위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이었다.
리가켐바이오를 설립한 김용주 대표 역시 LG화학 출신이다. 김 대표는 1983년 LG화학 기술연구원에 입사해 기술연구원 연구소장, LG생명과학 기술연구원 신약연구소장 등을 거쳐 2006년 회사를 설립했다. 리가켐바이오는 항체약물접합체(ADC)를 개발하는 기업이다. ADC는 항체에 약물을 붙여 암세포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술이다. 일반 세포에 미치는 부작용은 줄이고 치료 효과는 극대화해 핵심 항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리가켐바이오는 ADC에 특화된 플랫폼 ‘콘쥬올(ConjuALL)’을 통해 2016년 이후 매년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총 계약 규모만 약 10조원에 달한다. 리가켐바이오가 처음부터 ADC를 주력 사업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설립 초기 합성신약을 개발하던 중 ADC 분야의 성장 가능성에 눈을 뜨고 핵심 사업으로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에이비엘바이오, 올해만 8조 계약
이상훈 대표가 2016년 설립한 에이비엘바이오는 올해 8조월 규모의 ‘잭팟’을 터뜨렸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1월 12일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와 3조8000억원 규모의 뇌혈관장벽(BBB) 셔틀 플랫폼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K바이오 역사상 세 번째로 큰 규모의 기술수출이다. 회사가 보유한 플랫폼은 뇌혈관 장벽을 뚫고 약물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앞서 지난 4월에는 영국의 빅파마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과 약 4조1000억원 규모의 BBB 플랫폼 기술이전 계약을 맺은데 이어 올해에만 2건의 초대형 빅딜을 성사시킨 것이다. 에이비엘바이오는 플랫폼 기술뿐만 아니라 파킨슨병 치료제 ‘ABL301’, 담도암치료제 ‘ABL001’, 면역항암제 ‘ABL111’, 이중항체 ADC 등 다수의 파이프라인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창립 10년을 향해 가는 에이비엘바이오는 이 대표가 글로벌 톱티어 제약사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운 회사다. 카이론(현 노바티스)·아스트라제네카·제넨텍 등 세계 바이오산업의 최전선에서 경험을 쌓았다.
파멥신 공동창업 이후 한화케미컬 바이오사업을 총괄했지만 회사가 바이오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길을 선택해야 했다. 대기업의 ‘철수’는 개인에게 위기였지만 산업에는 기회가 됐다. 그는 2016년 동료 연구진 14명과 함께 에이비엘바이오를 창업했고 기술 중심 바이오벤처의 새로운 축을 세웠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증권가가 가장 주목하는 바이오주로 꼽히는 중이다.
엄민용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026년에도 그랩바디 B 신규 기술이전, 담도암 치료제 ABL001의 FDA 가속승인 등 굵직한 이벤트들이 예정돼 있다”며 “컴패스테라퓨틱스(미국)와 공동 개발 중인 담도암 치료제는 내년 1분기 임상 지표가 공개될 예정이며 긍정적인 결과가 확인되면 상반기 FDA 가속승인 신청과 하반기 승인·상업화까지도 가능한 타임라인”이라고 전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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