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정의 톱밥 먹는 중입니다] [12] 미국 사람 김범석이 모르는 ‘한국인특’

‘한국인특(한국인의 특징)’이라는 밈이 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길을 막지 않는 것, 북적이는 식당에서 종업원이 오기 전에 메뉴를 정해두는 것. 일터와 일상에서 내가 좀 더 신경을 쓰면 전체가 좋아진다는 판단들이다. 한국인은 자기 때문에 일이 늦어지거나, 남이 불편해지는 걸 못 견딘다.
쿠팡 물류센터에서도 볼 수 있다.
해고 후 나는 ‘새벽 배송’을 담당하는 심야 알바를 했다. 노동계가 ‘금지’를 주장했던 그 현장이다. 주문한 택배를 기다리는 심정은 그곳에서 일하는 모두가 안다. 특히 새벽 배송은 더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도 안다. 시급제 노동자의 보수는 물건을 9개 옮기나 10개 옮기나 같다. 그럼에도 몸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위에 언급한 ‘특’ 때문이기도 하고, ‘새벽 배송인데 새벽에 가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 덕분이기도 하다. 가끔 송장이 떨어진 채 돌아다니는 택배 박스를 보면 측은하다. ‘아이고 이 분은 물건을 제때 못 받겠구나.’
쿠팡 물류센터의 업무는 앞 공정이 늦어지거나 잘못되면 뒷 공정이 영향을 받는다. 이론이 아니다. 내가 물건을 놓치면, 같은 구역의 동료가 더 분주해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무거운 물건을 잘못 보냈을 때, 고참 언니는 ‘그러면 다음 공정에 계신 분들이 고생해요’라며 다시 규격을 알려주셨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고생을 꼼짝없이 목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적절한 성실함은 필수 덕목이다. 새벽 배송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관리자들까지 카트에 달라붙어 외친다. “조금만 더 빨리 해 주세요!” 노동자들은 뛴다. 먼저 마감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시간은 어차피 흐르고 시급은 또 어차피 정해졌음에도 대충대충 따윈 없다. 내가 늦으면 고객이 불편해진다, 내가 멈추면 동료가 더 힘들어진다. 직무 기술서에도 없고 임금에도 반영되지 않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내적 동기가 작동한다.
쿠팡 의장 김범석은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가 죽을 만큼은 일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 힘들게는 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의 CCTV 영상 가운데 회사 쪽에 유리한 대목만 부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급제 노동자들이야” “그가 왜 열심히 일하겠어? 말이 안 되지!”라고 했다.
김범석 의장은 모른다.
시급제는 그저 하나의 임금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노동 가치를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그 말을 썼다. 노동자의 죽음을 임금 체계를 향한 편견으로 덮으려 했고,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개인의 직무 태도에 전가하려 했다. 그는 노동자가 왜 자기 노동에 성실할 수 있는지 모른다. 미국 사람 김범석은 ‘한국인특’을 모른다. 한국에서 장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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