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적요 속에 피어날 암향을 기원하며

“젊은 것보다 늙은 것을, 살진 것보다 마른 것을, 번거로운 것보다 희귀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나무가 있다. 화려한 빛깔로 세상을 현혹하기보다 청초한 생김새와 그윽한 향기로 음전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매실나무다. 돌아온 날들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되는 세밑에 문득 떠오르는 나무다. 옛 선비들은 매실나무의 꽃, 매화에서 세속을 떠나 조용히 살아가는 은사(隱士)의 이미지를 보았다. 추위를 견디며 고매한 기품을 잃지 않는 지조를 닮은 때문이지 싶다. 선비들이 매화 향기를 일러 ‘암향(暗香)’, 곧 ‘숨은 채 피어나는 향기’라 칭송한 이유다. 번잡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고요 속에 침잠할 때 비로소 배어나는 내면의 품격이자 절제의 미학이다.
암향의 깊이를 담은 대표적인 나무로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의 매실나무를 꼽을 수 있다. 천년고찰 선암사 경내에는 20여그루의 매실나무가 흩어져 자라는데, 그중 백미는 원통전 뒤편에 홀로 선 큰 나무다. 무우전과 팔상전 곁의 홍매와 함께 ‘순천 선암사 선암매’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에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매실나무다.
긴 세월 동안 절집을 지켜온 이 매실나무는 높이가 7m이며,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역삼각형의 웅장한 생김새를 갖췄다. 600년이 넘는 세월의 풍진에도 노거수 특유의 늠름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는 게 돋보인다. 늙은 나무에 스민 은둔자의 위엄은 보는 이의 시선을 단박에 압도한다.
선암매 가지 위에서 새봄을 채비하며 꼬무락거리는 매화 꽃봉오리는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생명의 속삭임이다. 겨울 깊을수록, 가지 끝에서 몽실 부풀어 오르는 꽃봉오리의 소리에 가만 귀 기울여야 할 일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지난날의 번거로운 소음들은 모두 물러가고 평화와 안녕이 깊이 스민 적요(寂寥)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선암매의 그윽한 암향처럼, 깊고 은은한 평화가 우리 삶을 한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세밑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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