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도하에서 제주를 보다: 멈추지 않는 대화, 평화의 서사

고정선 2025. 12. 2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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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가장자리에 어둠이 내릴 때, 유리와 강철로 빚어진 도하의 스카이라인은 모래 위에 솟은 신화의 성처럼 기억 속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장면으로 오버랩됐다.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행동하는 정의(Justice in Action)'를 주제로 2025 도하포럼이 개최됐다. 올해는 특히 빌 게이츠,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등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주평화연구원은 2024년 도하포럼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이후, 국내 유일의 파트너 기관으로서 지난해부터 도하포럼에 참석하며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2025 도하포럼에서 진행된 제주평화연구원 세션 장면

페르시아만 연안의 작은 어촌이자 진주 채취항이었던 도하는 불과 한 세대만에 외교와 문화, 국제적 담론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사막과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이 도시는 사막 특유의 인내와 지속성, 수 세기에 걸친 항해와 교역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모래와 바다가 그려낸 그 무대 위에서, 도하는 지역과 세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현대의 이야기를 차분하고도 분명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2000년 카타르 국왕의 주도로 창설되어 올해로 23회를 맞이한 도하포럼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외교정책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이곳에 모인 세계적 지도자와 석학들은 국제 안보와 지정학적 분쟁은 물론, 기후 위기와 AI 거버넌스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난제들을 진단하며 복합 위기의 해법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서구사회와 이슬람권 및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 불리는 신흥국들을 잇는 가교역할을 해 왔다. 특히 중재와 연결을 중시하는 카타르의 외교 전통은 유엔이나 세계경제포럼,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등의 국제기구 및 세계적인 재단과의 긴밀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져 다양한 공동 세션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포럼은 전 세계적 분쟁과 인도적 위기를 '정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실행가능한 해법을 찾는 데 집중했다. 기조연설에 나선 빌 게이츠(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공동 이사장)는 글로벌 보건 및 교육 역량 강화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힐러리 클린턴(전 미국 국무장관)은 다자주의와 보편적 가치 수호를 통한 국제 리더십 회복을 강조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트럼프 오거니제이션 수석부사장)는 미국 우선주의 관점에서 선별적 개입과 효율성을 주장하며, 보편적 당위성보다는 자국 이익에 기반한 효율적 개입만이 국제질서의 왜곡을 막는 현실적인 정의임을 역설했다. 비록 미국의 신구 권력인 두 연사의 시각은 달랐으나, 미국의 글로벌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만큼은 궤를 같이하며 "정의와 책임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라는 포럼의 핵심 질문에 각기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제주평화연구원은 작년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동 평화 기여 방안'을 논의한 데 이어, 올해는 <양날의 검, AI: 군사 영역에서의 책임있는 활용 전략> 세션을 직접 운영했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의 기조연설로 시작된 논의에서'설계 단계부터의 책임'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AI 운용 능력이 국가 간 '전략적 신뢰'를 구축하는 핵심 자산임을 역설하여 국제사회의 큰 공감을 얻었다.

이번 포럼은 지정학적 긴장과 전쟁의 그늘 속에서 '단정적 해법' 대신 '과정으로서의 대화'를 제시하였다. AI 기술 앞에서 막연한 공포나 낙관 대신 '책임과 거버넌스'를 이야기했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배제가 아닌 중재와 신뢰 회복을 시도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세헤라자드가 밤마다 이야기를 이어가며 폭력의 시간을 지혜의 시간으로 유예한 '천일야화'처럼, 도하포럼은 갈등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대화를 통해 공존의 서사를 써 내려갔다. 사막의 대상(隊商)들이 별빛에 의지해 길을 찾았듯이, 도하에 모인 현대판 대상들은 중동 전쟁과 위기의 시대에 국제사회 공동의 규범과 가치라는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디지털 기술이 소통의 방식을 재편하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마주하며 지혜를 나누는 '현장성'은 여전히 특별하다. 도하포럼의 현장은, 바로 고대 이야기꾼들이 모래 위에 펼치던 지혜의 마당이었다. 중동 특유의 세련되고 절제된 환대와 대화의 장에서 직접 마주하며 쌓이는 신뢰, 그 공간에서 함께 만든 사유의 깊이는 그 어떤 기술로도 대신할 수 없는 '현대판 천일야화'였다.  

세계에는 수많은 국제포럼이 있지만, 모든 포럼이 장소의 운명을 품지는 않는다. 도하는 전통적으로 중개와 연결의 도시였고, 교역과 외교의 길목에서 언제나 '서로 다른 세계가 말을 섞는 장소', 즉 안전한 중립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오늘날 도하포럼은 그 '중재'의 전통을 계승해, 갈등의 원인을 규정하기보다 대화가 가능한 최소 조건을 마련하고,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폭력을 멈추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즉 대화를 지속하고 신뢰를 쌓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는 연결의 장소이기 이전에 기억의 장소일 것이다. 냉전, 분단, 제주 4‧3이라는 비극의 경험을 품은 섬이기에 제주는 궁극적으로 '왜 평화가 필요한가'를 증명하는 무대일 것이다. 도하포럼이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를 묻고, 현재의 갈등을 관리하고 있다면, 제주포럼은 국가 폭력의 기억, 냉전 질서의 잔재, 주변부의 시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왜 대화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평화가 단순한 외교기술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자 역사적 책임임을 제시해 나가고 있다.  
고정선 제주평화연구원 책임프로그램담당관

도하가 진주항에서 외교의 허브로 도약했듯이, 제주 또한 역사적 비극의 경험과 척박한 환경을 딛고 '평화의 섬'이자 국제회의의 거점으로 우뚝섰다. 이처럼 도하와 제주는 서로 닮은 듯 다른 궤적으로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도하포럼에 버금가는 20여 년의 역사를 쌓아온 제주포럼이 2026년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분열의 시대, 협력의 재구상"이라는 주제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갈등의 시대를 넘어 미래를 향한 날카로운 통찰과 풍성한 의제가 펼쳐질 '2026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에 도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 고정선 제주평화연구원 책임프로그램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