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되찾기 ‘환빠’ 원조, ‘홍익인간’ 교육이념 주창… 역사전쟁 대비 중요성 일깨워[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5)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과 ‘역사 찾기’ 파동
1975년 국사찾기협의회 창설
“단군실존·고조선 中지배” 주장
국정교과서 시정 논쟁 이끌어
중·고 교육과정에 단군 싣게돼
주류단체선 “사이비역사” 비판
‘세상 사람 유익하게’ 홍익사상
대립의 시대에 새길 가치 충분
강단-재야사학 갈등 넘어서야

◇ ‘환빠’ 논란이 소환한 인물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재야 사학자 안호상(1902∼1999) 박사. 그를 새삼 떠올린 것은 이른바 환단고기(桓檀古記) 논란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직접적 계기는 교수님께서 SNS를 통해 편지를 보내온 것이지요.
윤명철 교수님! 당신은 동국대를 퇴임한 후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에 초빙되어 대학원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지요. 거기서 이재명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환단고기를 언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국가가 역사 연구 방향은 물론 특정 책까지 거론한 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전례가 없겠지요.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교수님 편지를 받았을 때, 올 것이 왔구나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워낙 복잡하니 사유의 영토에 들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피할 수 없긴 합니다. 우리 고대사는 교수님과 제가 젊은 시절인 1980년대부터 대화를 나눠온 주제이니까요.
교수님은 1983년 대한해협 뗏목 탐사를 성공시켰습니다. 이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해양과 대륙을 항해·답사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쳤지요. 당시 소장 역사학자였던 교수님이 이끌었던 대학연합동아리에 속해 뗏목 탐사에 참여했던 것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환단고기 진위(眞僞) 공방을 오래 지켜봤기에 이번 논란이 정쟁으로 번진 것은 놀랍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그 책과 함께 그걸 추종하는 ‘환빠’까지 초들 때 예견했습니다. 야권의 공세가 거세자, 여권 빅스피커들이 “고대사 연구를 제대로 하라는 이야기” “뉴라이트 학자인 재단 소장에 대한 경고”라며 방어막을 쳤습니다. 대통령 속내가 그랬다면,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으면 됐을 것입니다. 굳이 모호한 말로 논란을 키웠습니다.
한 문화단체 기관장이 “대통령이 그 골치 아픈 ‘환빠’를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고 물은 것”이라고 할 때는 어이없더군요. 대통령의 말 어디에서 그런 뜻을 찾을 수 있습니까. 지록위마(指鹿爲馬), 즉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는 격입니다. 그 기관장은 ‘김건희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의 당사자인 최재영 목사가 좌파 지식인들과 함께 펴낸 책 ‘환단고기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는 못 본 척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에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역사연구가 이덕일의 책을 읽고 있다며 SNS에 소개했던 것도 눈감고 싶겠지요.

◇ 식민사학자 vs 사이비역사가
이번에 특히 주목한 것은 주류 역사학단체인 한국고대사학회와 한국역사연구회가 낸 성명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인사들이 일제의 대아시아주의를 모방해 ‘한민족의 위대한 고대사’를 주창하며 ‘사이비역사’가 싹텄다. 역사학계와 ‘사이비역사’ 사이에는 어떤 학문적 논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재야 사학을 ‘사이비역사’로 부르며 어떤 토론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인사를 거론한 것은 재야 사학자 중 일제강점기 군수를 지낸 자 등이 있어서입니다. 재야 사학자들이 주류 사학자들을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젖줄을 댄 강단 식민사학자라고 폄훼한 것에 대해 역시 친일 프레임으로 복수한 것이지요.
‘식민사학자’ ‘사이비역사가’. 이렇게 극단적 대립을 하게 된 근원엔 1980년대 역사 찾기 논쟁이 있습니다. 시민단체인 국사찾기협의회가 1981년 ‘국사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해 공청회가 벌어졌지요. 그때 참석한 김철준, 김원룡, 이기백 등 역사·고고학계 대표 학자들이 재야 사학자들과 일부 의원들에 의해 거친 공격을 받았습니다. 주류 학계에서는 존경받는 학자들이 일생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받았다고 분개했지요.
역사 찾기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재야 사학계를 이끌었던 이는 안호상이었습니다. 그가 1975년 창설한 국사찾기협의회는 단군은 실존 인물이며 고조선 영토가 베이징까지 뻗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운동 결과로, 중·고 국사 교과서에서 사라졌던 단군 건국이 되살아나고 고조선 강역으로 요서와 만주까지 포함하게 됐습니다. 협의회는 낙랑군의 위치가 중국 땅에 있었다는 주장도 펼쳤지요. 이는 2015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진행한 동북아역사지도가 무산된 배경입니다. 재야 사학자들이 국회 공청회 등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그려져 있는 것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박지향 재단 소장이 “재야 사학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 이유입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한 이유립(1907∼1986)도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호상이 주도한 국사 교과서 공청회에는 빠집니다. ‘대종교 좌파’라고 불린 태백교를 이끌었던 이유립이 상대적으로 과격한 주장을 하며 협의회와 마찰을 빚었던 탓입니다.
안호상은 말년에 대종교 수장인 총전교를 지냈습니다. 민족사상을 주제로 한 소설 ‘단(丹)’의 주인공이었던 권태훈의 후임이었지요. 대종교는 대종(大倧), 즉 환인·환웅·단군을 한얼님으로 숭상합니다. 1986년 당시 권태훈 총전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대종교는 종교(宗敎)를 벗어나 민족문화 맥을 잇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안호상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제강점기에 독일 예나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안호상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돈 숭배, 유물주의로 함께 배격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고유 전통사상에서 보편적 민주주의를 찾았지요. 그는 고조선 때 국인(國人)이 단군을 임금으로 뽑았다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기록을 중시했습니다. 신라에서 박 씨와 석 씨, 김 씨가 차례로 임금이 되고, 장자(長子)와 차자(次子), 남자와 여자가 모두 왕이 된 사례도 역사 속 민주주의 씨앗으로 봤지요.

◇ ‘홍익인간’은 고루한 이념?
안호상은 광복 이후 장관 시절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우리 교육이념으로 정하고 널리 퍼지도록 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 편에 나오는 우리 고유 사상이지요. 이에 대해 신화에 바탕한 교육이념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교육철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나왔습니다.
그분들의 주장처럼 “단군 이야기는 옛 신화로 웃고 넘기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쪽에 서고 싶습니다. 신화는 있는 사실을 설화체로 전하는 것이어서 그 자체를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 속에 사실(史實)의 파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례는 동·서양사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 나왔어도 ‘세상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하자’라는 홍익인간 정신은 갈등과 대립의 21세기 문명에서 충분히 새길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환단고기 이야기로 돌아가면, 교수님은 진즉 환단고기가 상정한 환국·배달국 연대와 강역 등을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5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남북으로 5만 리, 동서로 2만 리 땅을 다스렸다는 것은 세계 문명사 흐름으로 볼 때 불가능하니까요. (사실 나라가 오래됐다는 게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250년 된 미국이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걸 보면.) 다만 20세기에 누군가 지었다고 하더라도 거기 담겨 있는 고대사 인식과 천지인(天地人) 조화의 사상은 겨레의 선현에게서 나온 것이니 오늘의 우리가 보듬자고 했지요.
사상가였던 김지하 시인이 생전 천착한 것처럼 우리 상고사는 북방 유목 노마드 문화와 남방 농경 정착 문화가 묘하게 섞이는 공간입니다. 동양과 서양 문화가 어울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21세기 K-컬처의 원형이지요. 문화 영토를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근원입니다.

환단고기 내용을 이루는 책 중 ‘삼성기(三聖記)’가 조선왕조실록에 거명되는 것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을 사대했던 조선왕조가 중화(中華)에 맞선 우리 고대사 문헌을 많이 없앴고, 일제도 그런 일을 자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아 있는 사료에 눈감아선 안 되겠지요.
교수님께선 평소 고대사 연구를 위해 학제 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고고학, 종교학, 천문학, 복식학, 식품학 등 다양한 분야의 분석이 동반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강단-재야 사학의 대립을 넘어서야 하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중국, 일본과 외교적으로 잘 지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역사 전쟁에 적극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백전백패의 길로 가는 것이겠지요. 상고사에 대한 안호상류의 열정과 주류 학계의 치밀한 연구가 함께 만나 서로 존중하기를 바라는 것은 꿈일까요.
친일에 격분해 이혼
■ 우파 민족주의자 안호상
책 환단고기가 민족주의가 아니고 외려 식민사관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 상고사의 강역에 대한 기록 등이 일본 팽창주의자들이 그들의 역사에 적용한 내용을 흉내 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환단고기 논란이 벌어진 후 좌우 정쟁에서 나온 이 주장은, 재야 사학자들이 반민족주의자라는 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안호상은 그런 공격 대상에서 벗어난다. 그를 극우 국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그의 일생이 반일 민족주의로 일관한 사실은 인정한다.
1902년 경남 의령 태생인 안호상은 집안 아저씨인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1885∼1943)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와 중동학교를 다녔다.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 후 중국 퉁지(同濟)대에서 공부했다. 그때 만난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그에게 “올바른 민족역사를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평생의 지침이 됐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1929년 예나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3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돼 수배자로 지목받았다. 보전 교수 시절에 모윤숙(1910∼1990) 시인과 결혼했으나 헤어졌다. 모윤숙의 친일 행위에 격분해서였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맡았을 때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히틀러 유겐트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일자, 그는 신라 화랑도를 본떠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단일민족 정체성을 강조한 일민주의(一民主義·한백성주의)를 주창한 것도 파시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대부터 국사찾기운동을 이끌던 그는 93세였던 1995년 대종교 총전교로서 민족통일을 위한 물꼬를 트겠다며 방북해서 단군릉을 참배했다. 평생 공산주의를 배격했던 그에게 북이 조국통일상을 줬으니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타계해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21세기 대한민국 공동체에 국수적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과제를 남기고.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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