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전문직의 몰락? AI가 ‘미래 일자리 계급도’ 흔든다

오유진 기자 2025. 12.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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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회계·법조까지…상위 1% 직업군, AI 침투 가속화
현실화된 ‘모라벡의 역설’…도배·타일·배관공에 수요 몰려

(시사저널=오유진 기자)

# 의료 인력이 부족해 '응급실 뺑뺑이'가 잦았던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는 최근 인공지능(AI)이 응급실 당직의 겸 영상의학과 전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이 경기도의료원 파주·의정부·포천 병원과 함께 구축한 'AI 기반 응급의료 네트워크' 덕분이다.

이 시스템은 지역 병원의 검사 결과를 AI가 판독해 거점 병원인 일산병원으로 전송하고, 전문의가 이를 토대로 전원 여부나 환자 처치 방법을 결정해 환자가 좀 더 신속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파주병원에 내원한 심혈관질환 환자의 MRI·CT 결과를 AI가 판독해 일산병원에 전달하면, 일산병원 전문의가 전원 여부를 판단하고 시술 준비에 나서는 방식이다.

ⓒChatGPT 생성이미지

오성진 건보공단 일산병원 기획조정실장은 "지역 병원에는 야간에 영상 판독의가 전무하고, 응급실 당직의가 1~2명 수준이라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찾는 데만 2~3시간이 걸리곤 했다"며 "AI 판독 기술이 도입되면서 환자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송 전에 시술을 사전에 준비할 수 있어 1시간30분 이상 걸리던 대기 시간이 30분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일산병원은 2024년 이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3개 병원의 응급 이송 환자를 100% 수용하고 있다. 전문의 부족 문제가 'AI 당직의'로 상당 부분 해소된 셈이다.

# 삼일회계법인은 2018년 도입한 회계·세무 AI 챗봇을 회계사와 협업하는 AI 에이전트 수준으로 확장해 활용하고 있다. 감사 계획 단계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설계하고, 내부통제 테스트 시 정보를 추출하는 업무 등을 AI와 회계사가 협업하며 수행하는 방식이다. 삼일회계법인에 따르면, 회계사들이 수행하던 기초 업무에 AI를 투입하면서 연간 20만 시간의 업무 시간을 절감했다. 이는 회계사 80명이 연간 수행하던 업무량에 해당한다.

삼일회계법인 관계자는 "과거 1~3년 차 회계사들이 주로 담당하던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단순 업무를 AI가 흡수한 결과"라며 "정보 추출이나 데이터 전처리는 AI가 맡고, 회계사는 복잡한 판단, 리스크 해석, 커뮤니케이션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하는 'AI 협업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업계에 빠르게 스며들면서 국내 4대 회계법인(삼일PwC·삼정KPMG·딜로이트안진·EY한영)의 신입 회계사 채용 규모는 2019년 1100여 명에서 올해 700여 명으로 30% 이상 줄어들었다.

# 서울 서초동 법조계에서 AI는 신입 변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업무 파트너로 불린다. 김앤장·광장·태평양·세종 등 10대 로펌은 판례와 법률 문서를 자동 분석해 서면 초안을 작성하는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고, 내부용 AI가 없는 중소 로펌에서는 엘박스 등 AI 플랫폼을 활용해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후문이다.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느린 조직으로 불리는 법원에서도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 재판연구관 도입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법률 분야에서는 판례를 정리해 분석하는 2~3년 차 변호사의 역할을 AI가 뛰어나게 수행하고 있다"며 "판례가 많고, 흔한 사건일수록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월등해 '저경력 전문직' 수요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지식 노동의 신화, AI 앞에 흔들리나

전문지식 하나로 부와 명예를 독점했던 고소득 전문직이 AI로 인해 가장 먼저 흔들리고 있다. AI가 텍스트 기반 지식을 빠르게 학습하면서, 오랜 시간 '고부가가치 노동'으로 여겨졌던 지식 노동이 클릭 몇 번으로 대체 가능한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콜센터의 상담 업무나 제조업 등 저숙련 노동이 AI로 먼저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의사·변호사·회계사 등 전문직군부터 AI에게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이 AI에게 위협받는 현상은 '모라벡의 역설'로 설명된다. 모라벡의 역설이란 인간에게 어려운 수학·논리·법률 해석은 AI에게 쉽고, 인간에게 쉬운 걷기·운동·정교한 손기술은 AI에게 어렵다는 이론이다. 정형화·수치화가 가능한 데이터일수록 AI가 빠르게 학습하면서, 인간의 두뇌 노동이 가장 먼저 대체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이 직업별·소득별 정보를 활용해 AI 노출 지수를 산출한 결과, 고소득·고학력 직업이 밀집한 전문직일수록 AI 기술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한의사의 AI 대체 가능성은 99%로 전 직종 중 가장 높았고, 회계사(81%), 판·검·변호사(79%) 역시 현 수준의 AI 기술로도 직무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군으로 분류됐다. 반면 육아 도우미(25%)·성직자(2%)·가수 및 경호원(0%) 등은 대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 같은 변화는 노동시장에서 직업 선택의 기준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고소득 전문직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AI 대체 가능성이 낮은 업종으로 인력이 이동하는 흐름도 나타난다. 진학사 취업 플랫폼 캐치가 Z세대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연봉 3000만원을 받는 '화이트칼라' 직군보다 연봉 7000만원을 받는 '블루칼라' 직군을 선택했다. 블루칼라 직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로는 높은 연봉(67%), 기술직으로서 해고 위험이 낮다는 점(13%), 야근·승진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점 등이 꼽혔다.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낮다는 응답(3%) 역시 인식 변화의 요인으로 나타났다.

ⓒChatGPT 생성이미지

화이트칼라 대신 블루칼라…변화한 Z세대

실제로 최근 도배·타일·배관공 등 기술직 업종에서는 2030세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강도 노동과 일용직 위주 근무로 기피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AI로 대체되지 않을 '안전한 직업'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도배기능사·타일기능사·배관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기술자 가운데 40%가 40세 미만인 것으로 집계됐다.

도배사로 일하고 있는 최아무개씨(27)는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도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블루칼라 시장에 진입했다. 대학 졸업 후 중소기업의 경영지원 직군에서 일하던 그는 반복적인 사무 업무보다 매일 다른 현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최씨는 "고강도 육체노동으로 부담은 적지 않지만, 기술을 쌓으면 프리랜서로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데다 해고 우려가 없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회사에서 월 250만원을 받으면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작업 현장에서는 초보자도 일당 10만원 이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 수입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겪은 뒤 타일기능사로 재취업한 윤아무개씨(38) 역시 AI로 인한 일자리 대격변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직무 전환을 택했다. 윤씨는 "5년 이상 일을 쉬고 재취업을 준비하다 보니 생성형 AI 등 접해본 적 없는 기술 지식을 요구받았다"며 "뒤늦게 AI 활용법을 익혀 시류를 좇기보다는, 손기술 하나로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그는 "타일기능사는 시험장에서도 젊은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며 "치열한 취업문을 뚫고 입사해 AI와 경쟁하느니, AI가 쉽게 침투하지 못하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노동시장의 대격변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해외에서는 대학 진학률 하락과 더불어 블루칼라 직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영국 교육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영국 대학 학부생 등록률은 전년 대비 1.1% 낮아져 10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하락세를 기록했다. 영국 로이터는 "젊은이들이 대학 진학으로 인한 수천 파운드의 빚 대신 실습 위주의 직업훈련 기관으로 몰리고 있다"며 "최근 3년간 직업훈련 기관의 공학·건설·건축 환경 관련 과정 등록률이 9% 이상 상승했는데, 이는 AI 확산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국, AI 활용은 선두…인력 전환은 후순위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 같은 '직업 대격변'을 맞이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은 AI 혁신 속도나 활용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경직된 노동시장과 인력 구조로 인해 변화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AI 준비 지수는 165개국 중 15위다. 혁신 및 경제통합(3위), 규제 및 윤리(18위), 디지털 인프라(18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적자본 및 노동시장 정책(24위)은 선진국 중앙값보다 낮은 수준이다. 전체 취업자 중 대졸 이상 학력자 비율이 50%를 넘어서는 등 고학력 인재 비중은 높지만, AI로 인한 대전환 시대에 필요한 노동시장 유연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AI발 '직업 퍼펙트 스톰'에 대비해 유연한 노동시장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일자리 감소를 초래하는 만큼, 이를 위기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삼일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분석팀장은 보고서를 통해 "AI 도입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완화하려면 취약계층 등을 위한 사회적 보호와 유연한 노동시장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며 "취약계층에는 교육과 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AI 전환 적응을 돕고, 기업에 대해서는 AI 도입에 대응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의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AI 시대에 맞는 교육체계의 개편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중 하나다. 교육시장은 여전히 암기 위주의 입시 교육과 취업 중심의 대학 교육이 주축인 가운데, AI 활용을 배척하거나 금지하는 흐름이 남아있다. AI로 전문직이 가장 먼저 대체되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의대 선호 현상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AI와 교육을 철저히 분리해 AI의 침투를 막을 것이 아니라, AI와 공존하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고력과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AI 관련 규제 역시 재점검이 필요하다. 현재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역 단체는 AI 서비스가 직역 고유의 업무 범위를 침범하고 있다며 AI 도입을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AI로 인한 직업 대전환은 시점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할 미래"라며 "이를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문직이 독점해온 권위와 지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에 어떻게 적응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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