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탓, 연금 탓, 기업 탓…시장 탓! [광화문]

양영권 증권부장 2025. 12. 29.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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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1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통합별관 로비에 들어서면 '물가안정'이라는 한글 휘호가 눈에 들어온다. 서예가 김기승의 작품으로 1998년 2월부터 이 건물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 휘호는 중앙은행 독립을 상징한다. 이전까지는 '通貨價値(통화가치)의 安定(안정)'이라는 국한문 혼용 휘호가 걸려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5·16 이후 군사정권 시절 통화신용정책은 정부의 권한이었다. 금융통화위원장도 재무부장관이 겸임했다.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한은이 독자적인 통화신용정책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외환이기 이후다.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것을 계기로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다. 한은 설립목적은 '통화가치의 안정'에서 '물가안정'으로 바뀌었고, 한은 휘호도 군사정권 잔재를 지웠다.

한국은행법은 한은이 통화신용정책을 중립적으로 수립해 자율적으로 집행하게 보장한다.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고려는 물가안정을 해치지 않은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통화신용정책은 시장기능을 중시해 수행해야 한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물가 불안과 통화가치 불안의 일차적 책임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하는 한은에 있다. 그런데 한은은 최근 환율 불안이 유동성이 급격하게 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가계와 기업 탓을 했다. 유동성 때문이 아니라 거주자가 해외 증권 투자를 확대한 것이나 수출 기업이 외화 보유 성향을 강화한 게 더 큰 이유라는 것이다. 정부 역시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방법으로 개인투자자와 증권사, 국민연금, 외화보유 기업 위주로 대책을 쏟아놓고 있다. 당국은 책임이 없다는 인식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미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을 찾아 나선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2020년부터 언론에는 '서학개미'라는 말이 등장했다. 개인투자자들이 해외 채권과 주식 투자에 나서 환율에 파급효과를 미친다는 금융회사 보고서도 그즈음에 이미 나왔다. 역사적으로 우상향해 온 미국증시에 투자하는 것은 어쩌면 자산형성과 노후 대비에 합리적이다.

국민연금이 국내 채권 투자 위주에서 국내 주식과 해외 주식·채권 투자 비중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내 주가가 오를 때면 연기금이 국내 주식투자 비중 목표치를 초과하게 돼 국내 주식 매수를 중단하거나 매도하는 사례가 반복됐다. 기업 역시 투기 목적이 아닌 대금 지급 목적으로 달러가 필요한 입장에서,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수수료를 지불해가며 달러를 원화로 환전해놓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런데도 한은은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을 역대 최장기간 유지하면서 빚투를 용인했다. 하다못해 미국 국채를 사 두면 한국 국채에 투자할 때보다 수익률이 더 높다. 정부 역시 기금운용계획을 짤 때 국민연금이 외화수급에 미칠 영향을 간과했고, 국장 부양책을 짤 때도 연기금 이탈은 고려하지 않았다.

서학개미 증가와 국민연금의 자산 비중 준수, 기업의 달러 보유분 증가는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라 정책의 결과들이다. 가계와 기업은 합리적인 판단과 전망으로 시장원리에 순응했다. 그들을 탓하는 것은 결국 시장을 탓하는 것만큼 허망하다.

결과를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대책을 내놓으면 대증요법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또 다른 왜곡을 낳는다. 그간의 환율이 해외 주식을 사기에 너무 높다고 생각하던 투자자들은 일시적으로 환율이 낮아진 틈에 미국 주식을 늘릴 것이다. 국장 회귀를 유도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이 서학개미에게 '숨은 보조금'을 주는 게 될 수 있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과 해외투자를 줄여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환율을 낮추면 자원 배분에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한다.

가장 바람직한 환율 대책은 국민이 노후를 걸 수 있을 만한 기업이 많이 생겨나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합심으로 규제를 혁파하고 혁신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인 신뢰가 형성돼야 시장기능이 작동한다.

당장 해야 할 것은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을 해칠 정도로 정부 경제정책을 우선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다. 충분히 시장기능을 중시한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이었다면, 개미와 기업에 돌을 던져도 좋다.

양영권 증권부장 indep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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