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여성농민과 수녀

이시내 기자 2025. 12. 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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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클라베(2025)'를 봤다.

여성을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에서 교황 선출권은 추기경들에게만 주어진다.

영화 속 수녀들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농사와 부업, 가사와 지역사회 봉사 사이를 곡예하듯 오가며 일하는 여성농민들의 현실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2023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번기 기준 하루 평균 총노동시간은 여성이 8시간42분으로, 남성(7시간54분)보다 오히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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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클라베(2025)’를 봤다. 교황 선출 과정을 그린 정치 스릴러다. 신앙보다는 파벌 싸움과 권모술수, 인간의 욕망이 뒤엉키는 권력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 무대의 중심엔 남성들만 있다. 여성을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에서 교황 선출권은 추기경들에게만 주어진다. 수녀들은 화면 구석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교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이들이지만, 그림자처럼 보조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다.

영화 속 수녀들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농사와 부업, 가사와 지역사회 봉사 사이를 곡예하듯 오가며 일하는 여성농민들의 현실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2023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번기 기준 하루 평균 총노동시간은 여성이 8시간42분으로, 남성(7시간54분)보다 오히려 길다. 이들은 농업소득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겸업에 나선다. 가사일과 지역사회 봉사까지 떠안는다. 하지만 그만큼 권한과 대우가 따라오는지는 의문이다.

농업정책은 ‘농업경영체’를 중심으로 설계돼 왔다. 경영주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여성농들은 농사를 함께 짓고도 정책 혜택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농사 경력 40년이라는 한 여성농은 “고추건조기가 필요해 지방자치단체 지원사업을 신청하려다가 농업경영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며 “남편을 설득하고 허락을 구해야 했던 스스로가 초라했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2016년 공동경영주 제도를 도입했지만, 저조한 등록실적 등 한계가 있었다. 최근 겸업 제한을 일부 완화하며 등록 문턱을 낮췄다. 현장에선 환영하면서도 “갈 길이 멀다”는 반응이 나온다. 공동경영주라는 이름과 달리, 그 권한과 지위는 경영주와 동등하지 않아서다. 법률상 명확한 규정이 없으며 실상은 농업경영체 등록서식상의 지위에 가깝다. 법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권리는 행정의 틈새에서 증발되기 쉽다. 공동경영주를 법률에 명시된 ‘또 하나의 경영주’로 바로 세우는 일이 남은 셈이다.

콘클라베(Conclave)는 ‘열쇠로 잠근 방’을 뜻한다. 닫힌 공간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는, 시스티나 성당 유리창이 깨지는 후반부에 이르러 비로소 열린 세계와 만나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절반의 구성원을 소외시키는 공동체는 지속할 수 없다.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말한다면, 여성농에게 잠겨 있던 문부터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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