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구의 블랙박스] 당신이 마시는 건 스타벅스가 아니라 견고한 자산 불평등의 맛!

강양구 지식 큐레이터 2025. 12. 2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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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 작가의 말 “스타벅스는 사먹는 곳 아닌 월세 받는 곳”
취향으로 포장한 맥도날드일 뿐, 보통 사람의 현실은 거기서 거기

서울에 살지도 않고, 대기업에 다닌 적도 없지만, 연말에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정주행했다. 50대 초반 비슷한 또래 ‘김 부장’의 몰락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이 드라마의 원작자(송희구) 인터뷰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일찌감치 부동산 투자에 몰입했던 그는 이런 이야기로 유명하다.

“스타벅스는 사 먹는 곳이 아니라 월세 받는 곳.” 변변찮은 부동산 자산도 없으면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스타벅스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햇수로 27년이 됐다. 1999년 7월 27일, 지금은 상권이 죽어서 황량하지만, 세기말에는 대한민국 유행을 주도했던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1호점이 문을 열었다.

그래픽=박상훈

그렇게 문을 열고 사반세기가 지나면서 스타벅스는 먹고살 만한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한국 사회의 ‘스타벅스화(Starbuckization)’ 같은 개념을 고민해 볼 때가 됐다. 상식에 밝은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사회학자 조지 리처가 1983년 처음 내놓은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변주한 것이다.

리처는 미국을 포함한 현대 사회의 핵심을 포착할 새로운 상징으로 맥도날드를 내세웠다. 노동자는 매뉴얼의 ‘통제’를 따르는 단순 반복 작업으로 세계 어디서나 ‘예측할 수 있는’ 맛의 음식을 만든다. 소비자는 정해진 가격의 값싼 음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먹어 치운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소비자든 노동자든 ‘깊이’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리처의 맥도날드화는 1993년 같은 제목의 책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세기말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회학 개념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그즈음 세상과 한국 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 상륙한 스타벅스야말로 그 변화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스타벅스는 맥도날드와 대척점에 놓인 듯하다. 맥도날드가 속도와 효율만 추구하는 곳이라면 스타벅스는 여유와 감성을 허락한 공간으로 보인다. 싸구려 이미지의 맥도날드와 달리 스타벅스에 고급의 세련된 이미지가 덧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있지만, 맥도날드 다이어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스타벅스는 맥도날드와 다른 듯 닮았다. 대량으로 볶은 원두를 이용해 기계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쏟아지는 커피. 매뉴얼대로 만들어 전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풍미를 내는 수많은 음료. 어느 매장이나 비슷한 공간 구성. 그런 음료와 공간을 소비하는 일을 ‘세련된 경험’으로 간주하는 수많은 소비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바로, 이 대목에서 ‘스타벅스화’ 개념이 등장한다. 한국 사회만 놓고 보면, 대다수가 고만고만하게 살았던 한 덩어리의 소비 대중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서 또렷하게 분화하기 시작했다. 밥 한 끼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남보다 더 주머니를 열 여유 있는 소비자가 늘어났다.

여기에다 소셜미디어 같은 개인의 ‘취향’을 강조하는 플랫폼까지 등장하면서 너도나도 똑같이 소비하는 일이 촌스럽고 심지어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고급 취향의 소비는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스타벅스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사무실 탕비실 인스턴트커피나 저가형 커피 프랜차이즈가 주지 못하는 가장 가성비 좋은 5000원짜리 티 내기 소비 공간!

하지만 맥도날드 대신 스타벅스를 가는 사람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터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장시간 야근해야 하는 상황은 다르지 않다. 국내 대신 외국으로 휴가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급여가 잠시 통장을 거쳐서 카드사로 들어가는, 부채로 지탱하는 삶도 다르지 않다. 행운이 따른 소수를 제외하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 탓에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나는 일도 다르지 않다.

그러다 드라마 속 김 부장처럼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위태로운 삶.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원작자의 말(“스타벅스는 사 먹는 곳이 아니라 월세 받는 곳”)은 부동산 자산, 그것도 스타벅스에 세를 줄 정도가 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 보통 사람의 사는 꼴은 거기서 거기라는 슬픈 사실을 알려준다.

끊임없이 나와 우리 가족은 다르다고 티 내 보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 이 진실을 못 본 척 은폐하려 애쓰는 일. 이것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 스타벅스화의 본질이다. 그러고 보니, 1심 판결에서 민과 관이 유착해서 공공의 이익을 착복한 사기로 규정한, 부당 이득 환수조차 요원해진 대장동 사업의 뒷얘기에도 스타벅스가 등장한다.

그 핵심 일당의 지인이 약 1000만원을 투자해서 약 121억원을 배당받았다. 2020년 9월에 그가 법인 명의로 산 부산의 건물에도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단다. 정말, 대한민국의 스타벅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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