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수록 더 아름답다… 차 한 잔에 담긴 여백의 美

하영란 기자 2025. 12. 2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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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성 작가 '경남 찻사발 전국공모' 대상 수상
김해 지역 흙·진례서 채취한 자연철을 사용
인위적 완성을 드러내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반복 사용해도 질리지 않고, 시간 흐를수록
정이 쌓이며 더 좋아지는 그릇, 쓰는 사람의
일상과 함께 나이를 먹는 사발이 좋은 찻사발
제17회 '경남 찻사발 전국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상성 작가는 "찻사발은 누구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릇이다"라고 의미를 전했다.

찻사발에 열광하며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화려하거나 독특하지도 않고 어쩌면 밋밋한 찻사발이다.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는 매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참, 이 찻사발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오랫동안 찻사발을 빚어온 사람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제17회 '경남 찻사발 전국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상성 작가에게 '찻사발'의 미를 물었다. 김상성 작가는 (재)김해문화관광재단 김해창작공예지원센터 학예사 일을 하면서, 찻사발을 빚고 연구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김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늘 실험과 실패가 반복됐다. 흙과 불, 기법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작품이 잘되지 않더라도 결과를 다시 보고, 다시 만들며 원인을 공부했다. 실패한 작품 역시 다음 작업을 위한 중요한 자료였고, 그 반복이 결국 제 작업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라고 말했다. 또 "찻사발은 특별한 누군가만을 위한 그릇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릇이다. 거창한 의미를 담기보다, 차 한 잔의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김 작가에게 찻사발 관련해서 관심과 애정, 의미, 아름다움, 작업에 관한 것 등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다음은 김 작가와 오고 간 질문과 답변이다.

■ 찻사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왜 찻사발인가요?
김상성 작 '덤벙 분청항아리'

도자 작업을 해오면서 늘 마음에 남아 있던 것이 바로 기능을 완전히 감당하는 그릇에 대한 질문이었다. 조형적으로 완성도가 높아도 실제 쓰임 앞에서 흔들리는 작업은 늘 아쉬움으로 남았고, 그 지점이 제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느껴졌다.

찻사발은 도자기에서 기능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그릇이다.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감, 입술에 닿는 곡선, 차의 온기와 색을 담아내는 깊이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들이 모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찻사발은 도자의 마지막 끝이자, 동시에 계속해서 되돌아와야 할 출발점이다.

찻사발은 장식보다 사용을 전제로 한 그릇이기에, 작가의 의도가 과하게 앞서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물러나야 한다. 그 절제와 긴장, 그리고 반복되는 사용 속에서 드러나는 미감이 도자 작업을 통해 끝까지 붙잡고 싶은 지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찻사발에 더 깊이 몰두하게 됐다.

■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찻사발의 미'는 무엇인가요?
대상 수상 작품 '철화귀얄사발'

인위적 완성을 드러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지역에서 채취한 흙과 자연 철, 즉 지남철이 가진 고유한 성질이 작업 과정에서 억제되거나 장식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귀얄기법 역시 문양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손의 움직임과 순간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통제하기보다는 흙의 저항과 붓의 속도, 물성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찻사발의 표정이 됐다. 장작가마 소성은 불의 흐름과 재의 작용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요소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그 우연성이 흙과 유약, 철 성분과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바로 이번 작품에서 추구한 찻사발의 미다. 이 찻사발의 아름다움은 '잘 만든 결과'라기보다, 흙·불·사람이 자연스럽게 공존한 흔적에서 비롯된 미라고 할 수 있다.

■ 좋은 찻사발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찻사발은 먼저 눈으로 보았을 때 과하지 않고 편안해야 한다. 형태와 비례가 자연스러워야 시선이 머물고, 그다음에 손으로 들었을 때 무게와 균형이 몸에 무리 없이 스며들어야 한다. 찻사발은 손으로 느끼는 감각에서 끝나지 않고, 차를 담고 마시는 순간 입술의 감촉과 온기, 차의 맛까지 함께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손과 입을 거쳐 마음으로 전해질 때, 비로소 찻사발의 역할이 완성된다. 또 하나 중요한 기준은 시간을 견디는 힘이다. 반복해서 사용해도 질리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정이 쌓이며 더 좋아지는 그릇, 쓰는 사람의 일상과 함께 나이를 먹는 사발이 좋은 찻사발이다.
대상 수상 작품 '철화귀얄사발'

■ 이번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형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무심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찻사발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야 하지만, 그 안정감이 지나치게 드러나면 오히려 긴장감이 사라진다. 의도한 균형을 갖추되, 의도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지점이 가장 까다로웠다.

철화의 농도 역시 중요한 고민이었다. 농도가 조금만 강해도 장식적으로 보이고, 반대로 약하면 존재감이 사라지기 때문에 귀얄의 속도와 힘을 조절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했다. 붓질 하나하나에 계산과 직관이 동시에 필요하다.

장작가마 소성 과정에서는 불의 흐름을 끝까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늘 긴장된다. 불과 재가 남기는 흔적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이자 배움이다. 형태를 붙잡고, 장식을 비우고, 불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힘들고 어려웠다.
김상성 작 '분청 귀얄요변사발'

■ 사용하신 토와 유약, 소성 방식의 특징과 선택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번 작품에 김해 지역의 흙을, 진례에서 채취한 자연철, 즉 지남철을 사용했다. 이 흙과 철 성분은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보다는, 지역이 가진 토질의 성격과 밀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다. 찻사발이라는 그릇이 특정 장소의 시간과 기억을 담을 수 있기를 바랐다.

유약은 전통적인 재유를 중심으로 사용했다. 재유는 표정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소성 과정에서 불과 재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유약으로, 찻사발의 쓰임과 가장 잘 어울린다. 차의 색과 온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깊이를 만들어 주는 점이 선택한 이유다.

소성은 김해분청박물관 장작가마에서 진행했다. 장작가마 소성은 불의 흐름과 재의 작용이 매 순간 달라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흙과 유약, 철 성분이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많은 작품 가운데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단 한 점의 성공을 기다리는 과정이었고, 그 기다림 자체가 이번 작업의 중요한 일부였다.
김상성 작 '분청 덤벙 첫사발'

이번 작품은 재료와 기술을 앞세우기보다, 지역의 흙과 불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을 선택한 결과다.

■ 전통 분청·철화 계열 중 어디에 더 무게를 두셨고, 현대적 해석은 어떻게 담으셨나요?

이번 작업에서는 분청과 철화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분청의 기본 위에 철화와 귀얄 기법을 50 : 50의 비중으로 놓고 접근했다. 분청이 가진 자유로움과 생활 도자로서의 성격을 토대로, 철화의 농담과 귀얄의 움직임을 형태 안에 자연스럽게 얹고자 했다.

기법적으로는 전통 분청 어법을 충실히 따르되, 장식성을 강조하기보다는 형태와 구조, 특히 찻사발의 굽과 비례에 더 많은 무게를 뒀다. 겉으로 보이는 문양보다 사발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과 중심이 작업 핵심이다.
김상성 작 '철화귀얄사발'

새로운 표현을 더하기보다, 전통 기법을 최대한 덜어내고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현대적 해석을 담았다. 철화와 귀얄이 스스로 드러나되 과하지 않게 머무르고, 형태적으로는 불필요한 요소를 줄여 지금의 생활과 차 문화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는 찻사발을 지향했다.

이번 작품은 전통 분청의 틀 안에서 철화와 귀얄이 균형을 이루며, 형태 중심의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작업이다.

■ 한국 전통 찻사발은 오늘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차문화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찻사발은 단순히 과거의 형식을 계승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삶 속에서 여유와 관심을 회복하게 하는 매개체다. 빠르고 효율적인 일상 속에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잠시 멈추는 행위이고, 찻사발은 그 멈춤을 가능하게 하는 그릇이다.

전통 찻사발이 가진 담백한 형태와 여백의 미는 사용자가 그릇 자체보다 자신의 삶과 상태를 돌아보게 한다. 눈에 띄는 장식보다 비워진 공간이 더 많은 만큼, 그 여백 안에 각자의 일상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한국 전통 찻사발은 특별한 날을 위한 그릇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 속에서 차를 통해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마음의 균형을 되찾게 하는 도구로서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남 찻사발 전국공모전' 대상 수상은 큰 기쁨이자 동시에 더 신중하게 작업하라는 책임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결과에 앞서 과정에 충실하며, 차 한 잔의 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찻사발을 묵묵히 만들고 싶다"는 김상성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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