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실패로 얻은 것
100세 시대라고 할 때, 인생의 반 이상을 지난 지금은 지난날의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고 느껴진다. 신부가 되기 위해 매진하던 20대, 학문에 정진하던 30대, 주어진 일에 충실하려고 하던 40대보다 지금이 인격적·정서적으로 훨씬 풍요롭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삶의 풍요로움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패로 얻은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했다. 섣부른 기대, 게으름, 소통 부재, 적은 재능과 많은 욕심 등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날들 속에서 실패는 자주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이 손님으로 인해 현실 비판, 남 탓, 관계 단절, 자괴감 등 존재와 실존이 갈라진 날들 속에서 다음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틀린 것인가?’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많은 일이 풀리지 않아 고립된 시간은 길었다. 이 실패의 시간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은 ‘끈을 놓지 않은 것’이라 여겨진다. 사고 방식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사고를 포기하지 않았다.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넓어졌다. 관계를 끊는 결정이 아니라 때로는 침묵으로, 또 무관심으로 이어갔다.
흑백이 분명한 세계에서 흑백이 중첩되는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에 대해, 사람의 본성에 대해, 세상에 대해 겹쳐지는 색상들을 이해하게 됐고, 그 겹침이 어디에서 오는지 더 분별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분별력이 나 자신에 대한, 너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우리 모두는 중첩되는 색상을 지니고 있지만, 신은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색상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 있다. 이제 시작된 이러한 깨달음은 실패로 얻은 것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실패라는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 인삼 두릅 고기 맛이 난다고 하여 ‘삼나물’이라는 별칭을 지닌 ‘눈개승마’ 나물처럼, 실패는 오래 씹을수록 인생의 향미를 풍부하게 한다.
실패가 인생의 향미를 돋우는 재료라고 말해본들, 우리 자신이 겪는 실패의 괴로움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만큼 우리가 겪는 실패의 괴로움은 아리기만 하다. 이 아픔을 무심히 바라보고 감싸줄 가족이나 지인의 시선, 괜찮다고 말해주는 응원이 없다면 헤어나지 못하는 패배감에 함몰되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괜찮다!”는 그의 말이 큰 힘이 될 줄이야! 내가 감당해야 할 실패의 청구서가 눈앞에 훤히 보여도, 누군가의 “괜찮다!”는 그 말이 나를 붙들어 일으킨다. 사실, 그가 내뱉은 “괜찮다!”는 말은 그가 경험한 실패의 역사를 함축하는 말이며, 동시에 실패하는 나와 함께 연대하겠다는 따스한 말이었다.
실패의 세월은 단단함을 창조했다. 이 단단함은 하찮은 일상과 사소한 만남과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해주고, 진심으로 이 사소한 일들을 잘 간직하려고 애쓰게 한다. 또한 이 단단함은 여전히 물러 실패하는 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게 한다. 단단함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실패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보석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실패는 사라진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양한 사건과 만남에서 예측이 되는 실패와 예상하지 못한 실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실패의 쓴맛은 있겠지만, 실패가 만든 풍요로움을 제거할 수 없으며, 단단함을 무르게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실패는 더 깊고도 더 넓은 시선과 마음을 지니게 할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려는 우리 모두는 ‘내일’이라는 물리적 희망을 기대한다. 이 ‘내일’에 실패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실패를 받아 안고 골몰히 씨름하는 ‘오늘’의 시간은 ‘내일’의 풍요로움과 단단함으로 이끌 것이다. 따라서 실패는 오로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연말에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괜찮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저마다 올해를 되돌아본다. 여전히 긴 밤, 연휴 등이 있는 연말은 저무는 한 해를 되돌아보기에 또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새해를 계획하기에도 좋다. 우리 모두 한 해 동안 고생했고 또 다가올 새해에도 변함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한다. 이런 우리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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