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의 끝에서 유치환이 선택한 공간

이지원 2025. 12. 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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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문화] 유치환 시에 나타난 회한(悔恨)의 양상과 그 형상화 방식 - 『生命의 書』를 중심으로②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AI 생성 이미지.

세 번째 양상은 존재의 폐허화이며, 이는 감옥적 공간에의 자기 유기라는 형상화 방식으로 나타난다. 북방 시편들에서 자아는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회한을 감당하기 위한 윤리적 선택으로 폐허의 공간에 자신을 내던진다.

「北方十月」에서 "荒漠한 曠野를 鐵柵인양 눌러 막아"라는 구절은 광야라는 개방적 장소를 감옥으로 전환하며, "내 스스로 여기에다 버리려는 孤獨한 思惟"라는 고백은 유기가 자아의 자기 처벌임을 드러낸다. 침묵, 납빛 하늘, 허물어진 성터 등의 이미지는 정지된 풍경을 구축하고 회한의 시간성을 공간으로 치환한다.

「絶命地」에서도 자아는 스스로 탈주의 가능성을 제거하며 폐허의 공간을 윤리적 결단의 장소로 전환한다. "굳이 입명하려는 길에"라는 표현은 회한을 감당하기 위해 자아가 극한의 장소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위임을 드러내며, "타고 가는 망아지를 小舟인양 추녀 끝에 매어 두고"는 탈출 가능성 자체를 묶어 두는 상징적 제스처로 나타난다.

이 장면은 스스로에게 후퇴의 길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자기 단속이며, 회한을 피하지 않겠다는 결연의 선언이다. 이어 "悔恨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에서 회한은 자아를 심문하고 단련하는 능동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에서 회한은 스스로가 자기 존재를 갱신하기 위해 도입한 내적 규율이다. 존재론적으로 이 장소는 파멸의 지점이지만 동시에 면죄 가능성을 시험하는 임계 공간이 된다.

「曠野에 와서」에서는 폐허가 더욱 강하게 감옥적 구조로 확정된다. "나의 脫走할 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 停車場도 二百里 밖"은 탈주의 물리적·정신적 가능성을 모두 제거하며, 자아가 완전히 폐쇄된 공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시험하도록 만든다.

"鐵壁 같은 絶望의 曠野"는 본래 무한히 열려 있는 광야를 역설적으로 가장 밀폐된 감옥으로 변환시킨다. 이 감옥은 자아가 스스로의 회한을 외부에 호소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 채 순전히 내부에서 견뎌야 하는 고통의 장소이다. 그러나 유치환은 폐허 속에 자신을 가두지만, 이 감옥은 존재를 다시 설계하는 장소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생명의 서는 회한을 통해 자기 응시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불가능성 속에서 면죄와 구원을 모색하는 시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처럼 회한의 세 양상과 그 형상화 방식은 유치환 시의 서정 구조를 이루는 핵심 축을 형성한다. 회한은 자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장치된다. 자아는 회한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조건을 시험하고, 동일화의 실패를 통해 스스로의 균열을 인식하며, 폐허의 공간 속에서 존재의 자격을 재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은 회한을 파괴적 정서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회한은 자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다시 일어서도록 재촉하는 역동적 힘이며, 시적 구성의 중심 원리로 기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유치환을 생명과 초월의 시인이라는 기존 독해에서 벗어나, 회한을 통해 존재와 언어의 조건을 사유하는 복합적·윤리적 시인으로 재정립하게 한다. 그의 시에서 회한은 생명력의 고양을 가리는 부정적 그림자가 아니라, 오히려 시적 언어를 구성하고 공간을 재배열하며 존재의 논리를 다시 쓰는 창조적 장치이다. 자아는 회한을 감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규율하고, 그 규율 속에서 새로운 윤리적·존재론적 의미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회한은 시적 자아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윤리적 기획이며, 그 기획을 수행하는 과정이 곧 유치환 시의 미학적·사유적 지평을 형성한다.

종합하면, 생명의 서에서 회한은 감정의 표면을 넘어 시적 세계를 조직하는 기본 구조로 작용한다. 자아는 발화의 유예 속에서 언어를 재구성하고, 동일화의 반복 속에서 자기 분열의 실체를 확인하며, 폐허적 공간 속에서 존재의 한계를 시험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수사적·미학적·존재론적 층위가 긴밀히 결속된 체계로 나타나며,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과 밀도를 형성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유치환의 시적 세계는 생명파 시학의 단선적 범주를 벗어나, 회한을 매개로 존재의 조건을 사유하는 심층적 구조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생명의 서는 생명력의 상승을 노래한 시집이라기보다, 자아가 회한의 압력 속에서 말하고 침묵하며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려는 과정을 기록한 실존적 기록물이다. 회한은 파괴와 재구성을 동시에 수행하는 힘이며, 자아와 언어, 공간을 다시 세우는 내적 원리로 기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치환의 시학은 '생명의 시학'을 넘어 '회한의 시학'으로 재정립되며, 이는 한국 현대시가 지니는 윤리적 상상력을 새롭게 조명하는 해석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79호(2025)'에 '유치환 시에 나타난 회한(悔恨)의 양상과 그 형상화 방식- 生命의 書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은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이다. 

이지원

청주 출생. 「유치환시에 나타난 콤플렉스와 욕망의 상관관계 연구」로 <제11회 청마문학연구상> 우수상 수상. 학술 연구로는 「기형도 시에 나타난 미장센과 수사적 특성 연구」(2025), 「유치환 시에 나타난 헤테로토피아 구현 양상」(2023), 「정호승 시에 나타난 연민의 작동 방식과 의미 구조」(2022), 「기형도 시에 나타난 '고통'의 수사학」(2020) 등이 있다. 2021년부터 충북대학교 교양교육본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