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에 암살 당한 대공수사관. 그의 수사일기를 다시 펼쳐본 이유 [호준석의 역사전쟁]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5. 12. 2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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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권위 있는 언론인 단체인 4·7언론인협회가 출간한 ‘기자 25시’는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기록한 대작 출판물입니다. 이 저서는 1949년의 4대 사건으로 반민법 파동,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 백범 김구 암살 사건과 함께 김호익 총경 암살 사건을 꼽았습니다. ‘공산당 타도의 수문장 김호익 총경의 권총 피살 사건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에 뒤이은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당시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전국이 충격에 빠졌을 때입니다. 앞선 영상에서 설명드린 대로 국회 프락치 사건은 남로당이 국회의원 다수를 포섭해 미군 철수에 영향을 미쳤고,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던 당시 대한민국의 체제까지 뒤집을 수도 있었던 위기일발의 사건이었습니다. 남로당의 치밀한 비밀 공작을 끈질기게 추적해 전모를 밝혀낸 대공 수사관이 바로 김호익 총경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 총경은 함경남도 정평군 출신으로 일본 대학에서 유학한 뒤 8·15 해방 한 해 전 26세 나이로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해방 후 서울 중부서 사찰계 형사로 대공 수사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 서울시경 사찰과 정보주임에 임명됐고, 1949년 2월 삼팔선 부근 우리 군경의 경비 정보를 북한에 넘기던 남로당 중앙특수조직부 조직을 일망타진했습니다. 3월에는 요인 살해, 방화, 파괴 등 이른바 3월 공세를 준비하던 민애청(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위원장 이환기 등을 검거했고, 6월에는 7월 공세를 모의하던 영호남 남로당원 70명을 체포합니다. 일개 경위이던 그의 이름이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릴 만큼 김호익은 대공 수사의 스타였습니다.

이어 전국을 놀라게 한 국회 프락치사건이 일어납니다. 김호익은 오랜 기간 추적해온 여성 공작원 정재한을 6월 16일 개성(당시 개성은 남한 지역)까지 미행해 체포합니다. 40대 여성 정재한은 남로당이 빼낸 기밀 정보를 박헌영에게 넘기고, 박헌영의 지령을 수령해 오던 연락책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충무로2가 55번지 남로당 비밀 아지트를 급습해 결정적 문건들을 대량 압수하고, 안국동에서 박헌영 비서 박시현을 체포합니다. 이 문건들을 통해 북한에 포섭된 국회 부의장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등 국회의원 13명의 정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 혁혁한 공로로 김호익 경위는 경감으로 특진하고 서울시경 사찰과 중앙분실장에 취임합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런데 국회 프락치 사건 발생 두 달이 채 안 된 1949년 8월 12일 오전 11시. 옛 중앙청 앞에 있던 서울시경 사찰과 김호익 중앙분실장 방으로 군복 차림의 남자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내무부 치안국 모 과장의 위조된 명함을 건네며 과장의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냐며 명함을 받아보는 순간 남자는 가슴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7발을 연속으로 발사했습니다. 공산당이 없어져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신념으로 남로당의 집요한 공작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서른한 살 젊은 수사관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국회 내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비롯해 박헌영 직계 국제 간첩 사건, 법조계 및 법원 내 세포 사건 등으로 민애청과 남로당 핵심체를 여지없이 분쇄해 공산 계열에 치명적 타격을 주어 삼천만 겨레의 자유와 복지를 위해 찬란한 공적을 쌓아오던 김호익 경감이 피습 절명했다.”

범인은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36세 이용운이었습니다. 현장을 태연히 빠져나갔다가 옛 중앙청 앞에서 붙잡힌 그는 수사기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을 처단한 영웅이다. 너희들은 나를 사형시켜 죽일 수 없다. 너희들의 재판 놀음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인민공화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곧 인민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이용운의 진술에는 곱씹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망상 같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많은 남로당원이 이런 기대 또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인민유격대원들은 곧 인민해방군이 남하하거나, 김일성이 보내는 지원 병력, 무기와 탄약이 도착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여수·순천 사건 당시 14연대 반란군과 좌익 세력도 ‘인민해방군이 이미 대전까지 남하했고, 곧 인민공화국이 된다’는 지창수 등의 선동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이런 기대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절반은 공산당이 장악한 상태였고, 남한에서도 해방 직후 박헌영의 남로당이 건준을 접수해 대세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북한은 1950년 남침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적화통일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과 홍민표 전향 사건으로 조직이 궤멸되기 전까지 남로당이 4년 넘게 위세를 떨친 저변에는, 적지 않은 대중 사이에 결국은 공산당이 한반도를 접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그러나 좌익의 이런 기대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던 이용운도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인 9월 30일 사형 선고를 받고 11월 처형됐습니다. 그는 2년간 공산당 교육을 받은 남로당 특수별동대원으로, 군사기밀 수집 지령을 받아 방첩대 등의 군사기밀을 내사하던 자였습니다. 남로당이 김호익 총경을 암살한 것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남로당에 얼마나 뼈아픈 타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김호익 총경 영결식은 8월 16일 국립경찰전문학교에서 김효석 내무장관, 윤치영 국회 부의장, 이종현 농림부 장관, 김익진 검찰총장과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경찰장으로 엄수됐습니다. 장례위원장인 김태선 시경국장은 김 총경 피살을 남로당과 민애청 분쇄에 주력해 온 데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김 총경이 총격을 받은 날은 경감에서 총경으로 승진 발령을 받은 당일이었습니다. 아까운 나이에 떠난 젊은 대공 수사관은 모친 이유옥 여사와 서른한 살밖에 안 된 부인 강봉자 씨, 아홉 살 딸 영실, 일곱 살 아들 영정을 유족으로 남겼습니다. 김 총경 부인은 “평소 각오는 하고 있었다”며 “단지 좀 더 일을 하고 가셨다면 본인도 만족하였을 것인데 아이들을 잘 길러 유지를 잇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조선일보 1949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 김영정 씨는 2008년 김 총경의 59주기 제사를 지내면서 낡은 책 한 권을 한 언론사에 보냈습니다. ‘김호익 수사 일기’라는 이 책은 김호익 총경이 매일 쓴 일기였습니다. 1949년 ‘국제 간첩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1990년 갑자문화사에서 ‘김호익 수사 일기’로 다시 출판됐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고, 2008년 언론에 연재됐던 일기 내용 일부가 온라인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국내 정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고, 우리와 똑같은 생활인이자 청년이었던 대공 수사관들의 땀방울 흔적이 손에 잡힐 듯 인간적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1946년 7월 20일 자 일기에는 “온종일 대공 수사를 위해 양복이 온통 땀에 젖어 돌아다니다 집에 오면 수돗물을 온몸에 끼얹어 목욕하는 것과, 밤늦게 일기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며 “박헌영은 미군정이 길러준 방화와 파괴의 두목, 건국 도상의 조국을 좀먹는 소련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다. 체포령이 내려진 박헌영은 어디 숨어 있을까. 이런 생각에 1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썼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같은 해 7월 23일 자 일기를 보면 김 총경 같은 젊은 대공 수사관들이 맹목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아닌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무장돼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제창할 때는 인류 전체를 구하겠다는 몽상적 이상으로 터무니없는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 이론으로 빚어냈지만 오늘의 공산주의는 가는 곳마다 인류의 적이 되어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며 방화, 살인, 파괴로 세계 평화를 교란하는 하나의 괴물이 됐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다는 이 사상은 무고한 양민까지 감금하고 몸서리 나는 피의 숙청을 무참히 감행한다. 이런 잔인무도한 사상이 우리 민족에게 만연되는 날에는 멸망의 길만을 밟게 될 것이다. 우리 사찰경찰도 이 땅의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밤을 새워 가면서 악질 공산분자들을 취조하고 내사하고 체포하는 것이다.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 틈에 우후죽순 격으로 이곳저곳에서 공산당의 세포 조직은 여전히 팽창해 간다”라고 청년 김호익은 썼습니다.

1948년 12월 19일 자 일기에는 박헌영 비서 박시현을 미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서 결정적인 고리가 된 것이 바로 박시현의 체포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박시현은 확실한 혐의자지만 구속해 취조해도 묵비권을 행사하면 도리가 없다. 그들은 입술을 깨물고 피를 흘려도 다른 동무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의 단서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박시현을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다. 중부서에서 형사부장으로 근무할 때 박시현이 박헌영을 따라다니는 것을 알게 됐다. 8·15 후의 좌익 세력은 어느 정당보다 컸다. 나는 그들을 묵과할 수 없었고, 정당·사회단체 등록 제도가 실시되면서 나는 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나를 원수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웃고 지냈다. 어쩌다 만나면 다방에도 들어가고 담소도 하지만 언제든지 나에게 일격을 당할 때가 있으리라는 각오만은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 그들을 많이 알아두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것이 유일한 수사 자료이기도 했다. 박시현 역시 그때 알아둔 자의 하나다.”

같은 날 일기에서는 당시 대공 수사관들의 형편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두 달 전 경남에서 서울로 전근 온 박 형사는 경찰관 월급으로 하숙비를 도저히 물 수 없어 친구, 친지 집을 떠돌아다닌다. 아침은 항상 굶는다. 나 역시 생활이 풍족하지 못해 같이 있자고 말도 못 했다. 수도청 내에는 그런 형사가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은 막대한 공작비를 쓴다. 경찰의 예산이 빡빡해 급하게 쓸 일이 있어도 쓸 수 없다. 수사비가 나와도 먹을 것을 아끼고 쓸 것을 못 쓰면서 아끼고 또 아껴가며 한 범인을 체포하곤 한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김호익은 이미 공산주의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공산당이 없어져야만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음을 깨달은 선각자였습니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가족조차도 나라와 민족보다는 뒤로 돌렸던 대공 수사관들의 철두철미한 사명감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면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렇게 앞장서고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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