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행정에 세금만 쓰고... 여전히 죽어가는 새들 [하상윤의 멈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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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계획과 건축에서 유리는 심미성과 개방감을 극대화하는 필수 소재로 자리 잡았다.
도로 소음을 차단하면서도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 방음벽 그리고 디자인을 고려한 통유리 건물이 증가하면서 도시 경관은 더욱 투명한 형태로 변화해왔다.
그러나 사람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이 투명 구조물들은 야생조류에게 인지할 수 없는 치명적 위협이 된다.
새들은 건너편이 말갛게 보이지만 몸소 지날 수 없는 유리의 물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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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무시·반쪽 시공… 돈만 쓰고 관리·감독은 실종
행정 편의주의 민낯… 현장은 여전히 '새들의 무덤'


현대 도시계획과 건축에서 유리는 심미성과 개방감을 극대화하는 필수 소재로 자리 잡았다. 도로 소음을 차단하면서도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 방음벽 그리고 디자인을 고려한 통유리 건물이 증가하면서 도시 경관은 더욱 투명한 형태로 변화해왔다. 그러나 사람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이 투명 구조물들은 야생조류에게 인지할 수 없는 치명적 위협이 된다. 새들은 건너편이 말갛게 보이지만 몸소 지날 수 없는 유리의 물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만 연간 약 800만 마리, 일평균 2만~3만 마리의 야생조류가 건물 유리창과 투명 방음벽에 충돌해 폐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한 개체 수 감소를 넘어, 생물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생태적 재난 수준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제8조의2를 신설하고, 2023년 6월부터 공공기관이 설치하는 인공구조물에 대한 조류 충돌 저감 조치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법 시행 2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찾은 현장에서, 법령과 지침은 행정 편의주의와 무관심이라는 현실적 장벽에 부딪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핵심은 ‘5×10 규칙’이다. 통상 새들은 높이 5cm, 폭 10cm 미만의 좁은 공간을 비행 불가능한 '장애물'로 인식한다. 따라서 유리 벽이나 창에 조류 충돌 저감용 필름(스티커)을 부착한다면 반드시 최소 5㎝×10㎝ 간격으로 부착해야만 실효성을 갖는다. 하지만 다수의 공공기관은 환경부의 가이드라인인 이 기본 원칙조차 무시했다. 간격을 임의로 넓혀 빈틈을 주거나, 가로와 세로 규격을 혼동해 ‘10×5’로 거꾸로 시공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정도 만연했다. 가시성이 높은 건물 전면부만 시공하고, 사람 눈이 닿지 않는 측·후면은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환경부 지원으로 자재를 받고도 예산 절감을 핑계로 '체스판' 형태로 듬성듬성 붙이거나, 조망 확보를 위해 사람 눈높이 구간을 비워두기도 했다. 심지어 시공 편의만을 고려해 필름을 유리 안쪽에 부착한 탓에, 반사광으로 효과가 무력화된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 실효성이 전혀 없다고 판명 난 ‘맹금류 스티커(버드세이버)’만 관행적으로 붙여놓은 곳도 부지기수였다. 엉터리 저감 조치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채 부분 시공한 현장에서는 예외 없이 조류 충돌 흔적이 발견됐다.






이러한 행태는 예산 낭비를 넘어, '할 만큼 했다'는 착각 속에 수많은 야생조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생명을 구해야 할 안전장치가, 도리어 행정적 의무를 이행했다는 '면죄부'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현장을 모니터링해 온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유휘경 광주 동물권 단체 ‘성난비건’ 대표는 “세금을 투입해 저감 조치를 완료했다는 현장을 직접 가보면 놀라울 정도로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며 “공공기관이 남긴 잘못된 선례는 민간 시설물에 대한 규제 명분을 스스로 훼손하고, 제도 정착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광주 동물권 단체 ‘성난비건’과 ‘윈도우스트라이크모니터링 팀’은 지난 20일 이 같은 실태를 고발하는 <야생조류 유리창 충돌 망한 저감조치 사례집>을 발간했다. 사례집에는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수집된, 관계 법령과 지침을 위반한 36건의 ‘부적합 시공’ 현장이 담겼다. 단체 측은 "예산을 낭비하고도 정작 조류 충돌 예방 효과는 없는 잘못된 사례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카이빙을 기획했다"며 "공공기관 등 관리 주체들이 이번 사례들을 반면교사 삼아 기존의 엉터리 조치를 시정하고, 향후에는 세부 지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망한 저감조치 사례’ 전체 아카이브는 아래 링크된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angryvegangwangjeon.oopy.io/archive>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11613060000516)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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