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순천 왜성, 임진왜란 최후 격전지의 흔적 [앵+글로 본 남도 세상]

김덕일 2025. 12. 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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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습지에서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야트막한 구릉 위에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순천 왜성(倭城)이다. 갈대와 두루미로 평화로운 순천만과 달리, 이곳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호남을 노린 최전방 기지

1597년,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시절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성을 쌓았다. 불과 3개월 만에 급조된 성이다.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돌을 나르고 쌓았다. 목적은 분명했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한 최전방 군사 거점,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교두보.

순천 왜성은 남해안을 따라 축조된 여러 왜성 중 가장 서쪽에 있었다. 광양만과 접해 있어 해상 보급이 용이했고, 영남 해안의 자국군과 협동 작전을 펼치기에도 유리했다. 침략자의 눈에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 7년 전쟁의 마지막 격전

1598년, 이 성에서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최후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버티고 있는 순천 왜성을 포위했다. 왜교성 전투다. 성안에 갇힌 왜군은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했고,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했다. 그리고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이 전사한 바로 그 전투다.
 

# 조선의 성과는 다른 설계

순천 왜성을 걷다 보면 조선의 성곽과 확연히 다른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중 방어 구조다. 성곽은 본성과 외곽성, 그리고 내성까지 3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성처럼 성벽 한 겹이 아니라, 본성을 중심으로 여러 겹의 성벽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적이 첫 번째 성벽을 뚫어도 두 번째, 세 번째 방어선이 기다리는 구조다.

성벽을 쌓는 방식도 독특하다. 조선의 성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지만, 왜성의 성벽은 60~70도 경사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안정성을 높이고, 적군이 기어오르기 어렵게 만든 설계다.

가장 높은 곳에는 천수대가 있다. 지휘 본부인 천수각을 받치는 기단이다. 여기서 주변을 멀리 조망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지금도 이곳에 서면 광양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왜군이 이곳을 택한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 바닷물로 채운 해자

본성과 외곽성 사이에는 넓은 해자가 있다.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도랑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했다. 이 해자를 건너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이 성은 '왜교성(倭橋城)', 즉 '왜군이 만든 다리가 있는 성'이라 불렸다.

성문도 특이하다. 적이 직진할 수 없도록 'ㄴ'자나 'ㄱ'자로 꺾인 형태로 설계되어 있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이 막혀 있고, 방향을 돌려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방어에는 유리하고, 공격에는 불리한 구조다.

성벽 사이를 걸으며 생각한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조선 백성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적의 성을 쌓았고,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이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역사는 남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승리가 아니라 교훈이다. 침략군이 쌓은 이 성은 지금도 광양만을 내려다보며 당시의 순간들을 증언한다.

김덕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