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별리-홍세영 작곡가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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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영(1955〜2025년)은 지난 1980년대 '8504' 작곡 모임을 주도했던 우리 시대의 뛰어난 작곡가다.
그는 대구에서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수학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의 제의로 2003년 11월23일 '이정환 시에 의한 홍세영 작곡발표회'를 대구 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가졌다.
가끔 CD를 통해 그가 작곡한 가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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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나는 이를 붙좇지 아니 하고/ 멀리 가도록 둔다/ 더 멀리/ 가도록 둔다// 홀연히/ 떠나간 이의/ 뒷모습이 서름하여…….
『시하늘』(2025년 겨울호, 그루)
홍세영(1955〜2025년)은 지난 1980년대 '8504' 작곡 모임을 주도했던 우리 시대의 뛰어난 작곡가다. 그는 대구에서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수학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교에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많은 가곡과 합창곡, 동요를 작곡했다. 부녀간에 아코디언 연주로도 널리 알려졌고, 음악으로 사회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그의 제의로 2003년 11월23일 '이정환 시에 의한 홍세영 작곡발표회'를 대구 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가졌다. 그는 워낙 아이디어가 많고, 창의적이면서 추진력이 족탈불급이었다. 음악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날의 메인 성악가는 그 후 유명해진 소프라노 김상은이었다.
가끔 CD를 통해 그가 작곡한 가곡을 듣는다. 감미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음악회 이후 그와의 예술적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자주 만나서 음악과 문학의 접점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의 장녀인 아코디언 연주가 홍기쁨과 함께 듀엣으로 공연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대구시조시인협회 회원들의 시조를 다년간 다수 작곡했다.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가 2025년 11월 하늘의 부름을 받아서 떠났다. 그를 지상에 더는 붙들어둘 수 없어서 안타깝고 원통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형형한 그의 눈빛이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가능하다면 그를 오래 붙들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지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 후에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고,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캄보디아와 같은 먼 나라까지 찾아가 자비량으로 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여 60여 년의 지음인 나로서는 몇 줄 시 말고는 그에게 예를 갖출 길이 없어 「별리」를 썼다. 먼저 떠나는 이를 붙좇지 않고 멀리 가도록, 더 멀리 가도록 두었다. 홀연히 떠나간 이의 뒷모습이 서름했기 때문이다. 작별을 고하고 하늘나라로 간 그의 모습이 도무지 익숙하지 못해서, 익숙할 수가 없어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붙들 길이 영영 없었던 까닭이다.
마침내 영원 복락 세계에 이른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새로운 곡의 선율이 감미롭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하늘의 일이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예술적 열망으로 뜨거웠던 그를 간절히 기린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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