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쭉하고 딱딱한 걸 입에 넣으라니요”…위험한 달콤함이 부른 ‘바나나 대학살’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5. 12. 2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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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입술과 잘록한 허리. 사내들의 눈은 흐리멍덩해지고, 턱은 좀처럼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풀린 눈의 초점은 훤히 드러난 배꼽과, 그녀 머리 위에 올려진 노란 바나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넓은 공연장에는 ‘꿀떡’ 침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주인공은 ‘남미의 폭탄’이라고 불리던 1940년대 최고의 섹스 심볼, ‘카르멘 미란다’였다. 미국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복판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성취가 기꺼운 기업은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푸르트컴퍼니(UFC)였다. ‘바나나는 섹시하다’는 슬로건이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서, 바나나가 대량 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UFC는 돈을 쓸어 담았다.

바나나 소비는 달콤했으나, 생산은 쓰고 비렸다. 바나나 농장의 흙바닥은 수천 노동자의 피로 질척였다. 바나나라는 한 척도 안 되는 과일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경제사가 진득하게 녹아있다는 의미다.

과일을 얹은 모습으로 할리우드 스타가 된 카르멘 미란다.
바나나가 남미로 가다
바나나를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마젤란이었다. 1521년의 일이었다. 그는 괌과 필리핀에서 ‘길쭉한 무화과’를 발견하고, 이를 실어 남아메리카로 옮겼다. 맛과 향이 진해서 상품 가치가 있어 보여서였다. 바나나는 남아메리카라는 새 땅에서 성하게 일어나 널리 퍼졌다.

350년이 지난 19세기 말. 바나나는 여전히 남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운송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였다. 미국과 유럽은 바나나가 낯설었다. 일련의 사업가들이 호기롭게 바나나를 배에 실어봤지만, 썩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가 첫 세계 일주다.” 마젤란 탐험대의 빅토리아선.
가까스로 도착해도 미국 소비자들의 미감에, 바나나는 거슬리는 과일이었다. 길쭉, 딱딱, 곡선 삼박자가 어딘지 모를 부위(?)를 상기시켜서였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미국. 이 나라의 소비자들은, 바나나를 먹느니 굶어 죽겠다면서, 바나나에 침을 뱉었다.

바나나에 비로소 볕이 든 건, 1880년대였다. 냉장선(Reefer Ship)기술이 개발되면서였다. 이 기술을 눈여겨보던 이는 미국 철도 사업가 헨리 메이그스와 그의 조카 마이너 키스였다. 두 사람은 중남미 코스타리카에 철도를 까는 국책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었는데, 철도 노동자들을 먹이기 위해 사업장 바로 옆에서 바나나 농장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바나나는 중남미 날씨에서 재배하기가 쉬웠고, 그만큼 값이 싼 데다가, 두세 개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틀어막기 좋았다.

“나에게 바나나는 황금색으로 보인다네.” 마이너 키스.
유나이티드푸르트 컴퍼니의 등장
미래 먹거리를 우려하는 건 자본가의 천성이어서, 메이그스와 키스는 철도 이후의 먹거리 구상에 바빴다. 그들의 눈에 바나나를 우걱우걱 씹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들어왔고, 콧속으로 바나나 향이 스몄다. 그들은 노란 바나나가 황금처럼 보였다. 바나나를 냉장선으로 실어날으면, 새 것을 열광하는 미국의 졸부들이 쉽게 지갑을 열 것 같았다. 두 사람이 1899년 ‘유나이티드푸르트컴퍼니’(UFC)를 설립한 배경이었다.

생산은 쉬웠으나, 문제는 소비였다. 바나나는 여전히 미국인에게 ‘민망한’ 과일이었다. 이 괴리에 메이그스와 키스는 골머리를 앓았다.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의 입에 이 길쭉한 바나나를 밀어 넣을 것인가.’

뉴올리언스 세인트 찰스 애비뉴에 있는 옛 UFC 건물 입구.
새로운 시장을 연다는 건, 새로운 욕망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키스는 ‘건강’을 무기삼아 바나나 시장을 개척하고자 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돌이라도 씹어먹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당시 미국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소화기 질환인 ‘소아지방변증(셀리악증후군)’이 유행했다. 배가 부풀어 오르고, 물똥을 싸는 아이를 보는 부모들은 애가 끓었다. 사망률이 30%가 넘어서, “갑자기 물똥이 나온다”는 아이들의 우는 소리에 부모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제발 아프지 마렴.” 에드바르 뭉크의 ‘아픈 아이’.
“바나나가 해결책입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의사가 시드니 하스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빵과 감자를 끊고 바나나와 우유를 먹일 것을 권했다. 빵과 감자에 든 복합탄수화물이 아이들에게 독이 된다고 믿어서였다.(빵에 든 글루텐이 문제였다는 건 후대에 밝혀졌다)

바나나를 먹은 아이들이 굵고 거름진 변을 보자, 키스와 UFC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비로소 ‘바나나의 시대’가 열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나나는 아픈 아이를 살리는 신의 음식이었다. UFC의 선박은 매일같이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바나나를 실어 날랐다.

“우리 아기 이제 아프지 말자.” 매리 카사트 ‘더 차일드 바스’.
불씨를 불꽃으로 피우기 위해서, 키스는 바나나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카르멘 미란다가 주인공이었다. 브라질의 스타였던 그녀는 바나나를 머리에 올리고 열정적인 춤을 추는 모습으로 미국인의 마음까지 훔쳤다. 그녀가 출연한 ‘갱스 올 히어’는 1943년 미국인이 가장 많이 본 영화 10위에 올랐다. 카르멘의 음반 ‘나는 바나나로 돈을 벌어요’도 불티나게 팔렸다.

UFC는 그녀의 이미지를 빌려 ‘미스 치키타’라는 마스코트까지 만들었다. 바나나를 베어 무는 미녀들은 대중의 무의식적 성욕을 자극했다. 바나나 앞에서 미국인들은 잠시 청교도적 도덕 감정을 내려놓았다. 몸에 좋고, 달콤한 과일이 무슨 죄인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무뢰배들의 잘못이지. 바나나는 어엿한 미국의 국민음식이었다.

영화 ‘더 갱스 올 히어’에 미란다.
‘문어(El Pulpo)’의 탄생
미국에서의 대성공으로, UFC의 다리는 하나둘씩 늘어났다. UFC는 코스타리카 바나나 농장을 과테말라로, 온두라스로, 콜롬비아로 확장했다. 바나나 사업은 이내 철도, 우편, 전신, 항만 사업으로 번졌다. 남미의 사람들은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 우편을 보내기 위해서,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서, UFC를 거쳐야 했다.

사람들은 UFC를 ‘엘 풀포(El Pulpo)’라고 불렀다. 문어라는 뜻이었다. 문어의 발처럼, UFC는 중남미의 모든 것을 휘감아 빨아먹고 있었다.

“우리 배는 바나나처럼 길지.” 뉴올리언스 항구에 정박한 UFC 함대. 1910년.
자본주의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핵심 키워드는 ‘경쟁’이지만, 바나나라는 황금 사업에는 쉽사리 신규 사업자가 진입하지 못했다. UFC가 자본을 앞세워 모두 인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1930년까지 UFC가 인수한 바나나 회사는 20개에 달한다. 후대 경제학자들은 ‘독점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독점은 작은 옹기에 물이 고이는 일과 같아서, 새 물이 유입되지 않은 옹기에는 악취가 났다. UFC는 견제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중남미 민중에게 월급을 주는 건 UFC였으니까. 나랏님조차도 UFC 앞에서는 한낱 이방 같았다. 철도를 깔아주고, 세금을 내면서, 동시에 뒷돈을 먹여주는 기업에 쓴소리할 위인이, 적어도 중남미에 존재하진 않았다. 중남미는 점점 노랗게 물들어갔다. 바나나 하나에 의존하는 ‘바나나 공화국’이었다.

“바나나는 새로운 엘도라도라네.” UFC 함대 홍보 팸플릿.
폭력의 아이콘 UFC
UFC는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대로, 폭력적인 경영으로 유명했다. 1928년 12월 6일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콜롬비아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요구 조건은 소박했으나, 그들의 표정은 절실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달라”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 회사 경영진은 미소를 지으며 미국 정부에 로비를 넣었다. “콜롬비아의 파업은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였다.

미국 국무부 장관 프랭크 켈로그는 ‘빨갱이 알레르기’가 있는 인물이어서, 콜롬비아 정권에 “UFC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으면 미 해병대를 상륙시킬 수 있다”는 경고장을 보냈다. 콜롬비아 정부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이 모인 농장으로 군대를 보냈다. 수천명의 노동자, 그들의 아내, 그들의 아이가 모인 현장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콜롬비아 군대는 ‘시민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폴란드 화가 스타니스와프 렌츠의 ‘파업’.
광장은 피로 가득 차서, 시신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군은 통곡하는 유족을 걷어차면서, 시체를 거둔 뒤 기차에 실어 바다에 버렸다. ‘바나나 대학살’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군의 총질에 너덜너덜해진 노동자들을 보듬은 건 문학이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백년의 고독’이었다. “3000명이 죽었네. 바나나 회사 놈들이 기관총으로 몽땅 쏴 죽여서 시신을 기차에 실어 바다에 버렸어.”

피비린내음이 가득한 대학살에도, UFC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서, 총 350만에이커에 달하는 중남미 농장에서 바나나를 수확했다. 서울 전체 면적 대비 23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중남미 전체에 바나나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백년 동안의 고독’.
UFC에서 벗어나려는 과테말라의 개혁
나라를 구성하는 세 축은 ‘국민, 영토, 주권’인데, 1950년 과테말라는 한 축이 짧아 불안했다. 경작지의 70%를 UFC가 소유하고 있어서였다. 외국 기업이 국토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헌데 UFC가 실제로 농사짓는 땅은 이 중 1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혹여 경쟁 기업이 들어올까 사들인 땅이었다. ‘알박기’였다. UFC는 매해 거대해져 가는데, 농민은 하나같이 가난한 모습 그대로였다.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는 피가 끓는 열혈 민족주의자여서, UFC의 전횡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놀고 있는 UFC의 땅을 유상으로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다. 보상금은 UFC가 신고했던 땅값을 기준으로 삼았다. 세금을 적게 내려고 터무니없이 낮게 신고한 값이 기준이었다. 아르벤스 식 토지개혁이었다. UFC는 참지 않았고, 바나나에서 다시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UFC에겐 쉬운 방법이 있었다. ‘빨갱이 배후설’이었다. 미국 덜레스 형제에게 SOS를 쳤다. 형인 존 댈러스는 미국의 국무장관, 동생 앨렌 댈러스는 CIA 국장이었다. 두 사람은 UFC의 법률 자문을 맡았던 로펌 출신이었다. 정치와 경제는 강철로 연결돼 한 몸처럼 보였다. UFC가 이번 사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델레스 형제에게 전하자, 형 존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공산주의 대장 소련이 남미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말했고, 동생 엘렌은 언론을 불러 ‘반공주의’ 군불을 땠다.

가짜 뉴스는 손쉽게 유력 언론 1면에 올랐다. 아르벤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새 소련의 앞잡이요, 미국의 첫 번째 표적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각하, 우리의 앞마당 중남미가 빨갛게 물들고 있습니다.”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존 포스터 델레스 국무장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과일회사가 한 나라의 정권을 바꾸다
1954년, CIA가 움직였다. 작전명 ‘PB SUCCESS’. 과테말라 군인 카를로스 아르마스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는 작전이었다. 아르마스는 CIA의 지원 속에 수도 과테말라시티로 군을 진격시켰다. CIA는 “정부군이 투항하고 있다”는 허위 라디오 방송으로 반군을 지원했다. 민주 정부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배후로 둔 반군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통령 아르벤스는 그 길로 망명길에 올랐다. 과테말라에는 친미 군사 독재 정권이 자리를 잡았다. UFC는 땅을 온전히 돌려받았다.

“이놈들이 다 도둑놈들이오.” 멕시코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 남편)가 그린 벽화 ‘글로리오사 빅토리아’. 과테말라 쿠데타가 미국 정부, UFC, 가톨릭교회의 합작품임을 꼬집은 작품이다. TortugaHalo
외국 기업의 기만에 나라의 지도자가 뒤바뀌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기가 막혀서, 과테말라 시민들은 이 정권의 뒤바뀜을 인정하지 않았고, 과테말라는 36년간 내전에 빠져들었다. 20만명이 넘는 국민이 죽거나 실종됐다. 바나나의 비극이었다.

(이 쿠데타 현장을 목격한 26세의 아르헨티나 의사가 체 게바라였다. 바나나 기업의 탐욕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혁명가를 탄생시킨 셈이다).

남미에 사회주의를 뿌리내린 체 게바라.
남미의 눈물
폭력, 비리로 얼룩진 UFC는 1990년 아메리칸파이낸셜 그룹에 의해 인수됐다. 바나나에 묻은 핏자국을 감추고 싶어서, UFC는 치키타로 사명을 바꿨다. 귀여운 로고 뒤로 피 묻은 과거를 세탁하고 싶어서였다.

처음 맛본 자본주의가 너무 쓰고 맵고 떫어서, 중남미는 그 이후로 좀처럼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회주의 정권의 잇단 실정이 가난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의 시민들은 자본주의를 품기를 주저했다. 중남미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 중 하나. 바나나 껍질 안에 숨겨진 고약한 진실이었다. 칠레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로써, 아픈 마음을 보듬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가장 달콤하고 육즙이 많은 조각을 차지했다/ 내 조국의 중심 해안, 아메리카의 잘록한 허리를/ 그들은 그 영토의 이름을 ‘바나나 공화국’이라 다시 지었다/그리고 잠든 시체 위로, 불안한 영웅들 위로, 공화국의 깃발들을 획득한 자들 위로, 그들은 파리떼를 풀어놓았다’

-유나이티드 푸르트 컴퍼니 中

파블로 네루다는 시로써 미국 기업들의 탐욕을 비난하고, 남미 국가들을 위로했다.
<네줄요약>

ㅇ미국 사업가 마이너 키스는 코스타리카에 철도 사업으로 돈을 벌었는데, 바나나를 수출로 영역을 확장했다.

ㅇ수출을 시작한 이후, 바나나가 전염병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지면서 바나나 수익이 크게 늘어났고, 키스는 UFC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ㅇUFC가 중남미에 땅을 잠식하고 횡포를 부리자, 과테말라에서는 토지개혁으로 땅을 몰수 했는데, UFC는 이에 불복해 미국 정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ㅇ이후 과테말라는 오랜 기간 내전에 빠졌고, 남미에서는 자본주의가 쉽게 뿌리 내리지 못했다.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역사(히스토리)와 경제(이코노미)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기자 구독을 눌러주세요.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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