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대로면 석화 구조조정도 어렵다

김아사 기자 2025. 12. 2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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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지침 발표… 합병·매각으로 정리해고 예상되면 파업 가능
근로시간·작업 관여 땐 ‘사용자’… 대기업에 교섭 요구 줄이을 듯
현대차 비정규직지회가 지난 12일 현대차 울산공장 앞에서 결의 대회를 연 모습. 이들은 현대차와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하청업체 노동자들로, 현대차 공장에서 보안·미화·급식 등 업무를 맡고 있다./민주노총 텔레그램

내년 3월부터 노조가 회사의 구조조정이나 정리 해고를 반대하기 위해 합법적 파업을 하는 게 가능해진다. 구조조정은 기업 합병이나 매각, 해외 공장 이전 등 경영상 결정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기존 법원 판례에서도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사안이다. 사실상 기업 경영권에 대한 본질적 침해가 발생하는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6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 노동조합법(일명 노란봉투법) 해석 지침’을 발표하고 내년 1월 15일까지 행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이 해석 지침은 노동위원회 등에서 벌어질 노사 교섭, 분쟁에서 기준점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8월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노동 쟁의 범위를 ‘근로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 결정’으로 확대했다. 노동부는 이날 해석 지침에서 “합병, 분할, 매각, 양도 등 결정에 따라 정리 해고, 배치 전환 등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경우 고용 보장 요구 등에 관한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당장 정부 주도로 진행 중인 석유화학 분야 사업 재편 작업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 등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노조가 파업을 통해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양인성

노란봉투법의 또 다른 핵심인 ‘사용자 범위’와 관련해선 ‘구조적 통제’가 핵심 기준으로 제시됐다.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근로시간, 복지, 작업 일정 등 노동조건을 사실상 결정하는지가 사용자 여부를 가릴 잣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급·하청 구조에선 일정 부분 통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데다, 계약 미준수에 따른 도급 계약 등의 해지도 ‘구조적 통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경우 대기업은 다수의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해야 해, 1년 내내 교섭을 벌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영 단체들은 “이번 해석 지침은 내용이 명확하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커 산업 현장의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노란봉투법의 역설… 하청 안전 챙길수록 ‘사용자’ 될 리스크 커져

고용노동부는 26일 내놓은 노란봉투법 해석 지침에서 “합병, 분할, 양도, 매각 등 사업 경영상 결정 그 자체만으로 단체교섭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면서도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근로자 지위 또는 근로 조건의 실질적·구체적 변동을 초래하는 정리해고·구조조정이 동반되면 단체교섭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판례에 반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정리해고나 사업 조직 통폐합 등 기업의 구조조정 실시 여부는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이라며 “노조가 이를 반대하기 위해 진행하는 쟁의행위는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왔다. 내년 3월부터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이런 법원 판단 기조 자체도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장 정부가 주도하는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역시 파업에 직면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내 전체 NCC(나프타 분해 시설) 생산 설비 중 20%가량의 감축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데, 이 경우 인력 구조 조정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합병·분할 등 사업 경영상 결정은 단체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그동안의 판단 기준이 무력화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도급 구조 자체가 리스크

노동부는 노란봉투법의 또 다른 핵심인 ‘사용자 범위 확대’와 관련해 원청의 하청에 대한 ‘구조적 통제’를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는 원청이 하청의 영업일수, 작업 시간, 근무 방식 등을 결정하는 걸 말한다. ‘하청 업체의 원청 업체에 대한 조직적 편입, 경제적 종속’도 사용자 여부를 가릴 보완 지표로 언급됐다. 노동부는 이 외에도 노동안전, 작업환경, 복리후생, 근로시간, 임금수당 등 각 근로 조건 영역에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했다면 원청과 하청 노조가 교섭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각각의 기준이 너무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경영계에선 납기 관리, 품질 기준 설정, 거래 조건 변경 등 원·하청 관계에서 불가피한 관리 행위 역시 ‘구조적 통제’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부는 이날 “도급 계약이 맺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구조적 통제가 인정되진 않는다”며 “납기·품질 요구, 거래 조건 협상·변경 등 요구는 일반적인 원청의 관리 범위 내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관리 행위는 하청의 근로 조건을 변동시킬 가능성이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납기 요구로 인해 야간 근무가 발생하고, 품질 요구로 인해 작업 공정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한다”며 “현실에서 이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도급 계약을 체결하면 구조적 통제 외형을 갖출 수밖에 없다”며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원청 업체의 도급 구조 자체가 리스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산재 감소 노력하라더니

이날 해석 지침을 두고, 정부의 산업재해 감소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부는 노동안전 분야를 거론하며 “산업안전보건체계 전반을 실질적으로 지배·통제하는 경우에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하청 업체에서 산재가 잇따라 발생하자 위험 요인 제거, 안전 설비 설치 등 사고 예방을 위한 원청 업체의 여러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사용자로 인정돼 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원청의 하청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조치 의무 이행도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조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공공기관의 경우 정부의 사용자성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지침에 언급된 점도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에 인건비 총액 상한을 정해 임금, 정원, 성과급 등을 관리하는데, 이것을 실질적 지배력 행사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러나 노동부는 “법령·조례나 국회의 예산 의결로 정한 기준을 정부가 집행하는 건 공공정책의 결과”라며 “노사 간 교섭 대상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구조적 통제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근로시간, 작업 일정, 작업 환경 등 구체적인 근로 조건을 사실상 결정하거나, 하청 사측이 결정하는 걸 제한하는 것. 정부는 내년 3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이런 경우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실질적 사용자가 되기 때문에 단체 교섭에 나서야 한다는 지침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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