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정당행위'에 대한 상반된 판결

김고은 기자 2025. 12. 2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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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피해아동 얼굴 공개한 SBS '그알' PD 기소유예 '취소'
서부지법 폭동 사태 기록한 다큐 감독은 항소심서도 '유죄'

저널리즘 행위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이 최근 잇따라 나왔다. 한 건은 “수사미진으로 인한 자의적인 검찰권의 행사”를 바로잡은 헌법재판소 판결이고, 다른 한 건은 “명백한 심리미진”이자 “위법”이라 비판받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다. 전자의 판결로 한 저널리스트는 범죄 혐의를 벗었지만, 후자의 판결로 또 다른 저널리스트는 형사 처벌을 앞두게 됐다.

헌재는 18일 학대 피해 아동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의 이동원 PD가 청구한 기소유예처분취소 사건을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인용했다. 2021년 1월 이른바 ‘정인이 사건’이라 불린 양천구 아동학대 사건이 방송된 지 5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2021년 1월 방송한 '정인이는 왜 죽었나, 271일간의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편. 방송에서 사망한 피해 아동의 얼굴이 모자이크 등 별다픈 편집 없이 그대로 노출됐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SBS

당시 방송 이후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은 피해아동의 얼굴과 생년월일 등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동학대처벌법 위반행위에 해당한다며 이 PD를 고발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35조 2항은 ‘아동보호사건에 관련된 아동학대행위자, 피해아동, 고소인, 고발인 또는 신고인의 주소, 성명, 나이, 직업, 용모, 그밖에 이들을 특정하여 파악할 수 있는 인적 사항이나 사진 등을 신문 등 출판물에 싣거나 방송매체를 통하여 방송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을 했고, 고발인이 이의신청을 해 서울서부지검에 사건이 송치됐으나, 해당 검사 역시 범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불기소처분했다. 이에 고발인이 다시 항고하자 서울고검이 재기수사명령을 했고, 결국 검찰은 2023년 6월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기소유예란 범죄 성립은 인정되나 재판에 넘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에 이 PD는 해당 방송은 공익적 목적의 보도로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기소유예처분 취소를 헌재에 청구했다.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에는 비슷한 시기 있었던 헌재와 법원 판결이 영향을 미쳤다. 앞서 2019년 JTBC는 아동학대 가해자의 실명과 얼굴을 보도해 아동학대처벌법 위반으로 약식명령을 받자 재판부를 통해 “무조건적으로 아동학대행위자 관련 보도를 금지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그러나 2022년 헌재는 해당 조항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이후 JTBC 건은 선고유예 판결이 확정됐다.

헌재는 그러나 그알 사건은 달리 봤다. 헌재는 JTBC 보도와 그알의 보도 행위는 “구성요건적 행위 자체가 다를 뿐 아니라, 구체적 목적과 수단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검찰이 “방송이 이루어지게 된 전후의 사실관계”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인지 여부를 면밀히 판단하지 않은 채 기소유예처분을 한 것은, 정당행위에 관한 중대한 법리오해 또는 수사미진으로 인한 자의적인 검찰권의 행사”에 해당하므로 청구인(이 PD)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헌재는 위법성 조각 여부를 판단한 근거로 그알 방송이 “가해자의 범행 내용에 부합하는 처벌을 촉구”하는 목적 등이 있었고, 실제로 방송 이후 검찰과 법원이 아동학대치사죄에서 살인죄로 공소장을 변경해 유죄가 확정됐으며, 후속조치와 제도적 보완 등이 이뤄진 점, 그리고 복수의 언론상을 수상한 점 등도 참작했다.

결국 헌재의 판단은 법률 위반행위의 위법성 조각 사유를 “면밀히 판단”하지 않고 기계적 혹은 자의적으로 처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스트 정윤석 감독에 대한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잇따른 유죄 판결은 향후 헌재 판단을 구해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서부지법 폭동'을 기록한 정윤석 감독이 7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무죄 탄원 관련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정 감독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뉴시스

서울고등법원은 24일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를 기록한 정윤석 감독에게 건조물침입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에 따르면 항소심 법원은 정 감독이 집회 참가자들과 “합류하거나 합세하지 않고 그와 동떨어져서 촬영만 했”기 때문에 특수건조물침입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정윤석 감독의 진입을 다른 피고인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건조물침입죄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의 촬영행위가 정당행위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변은 이날 논평에서 “법원에 제출된 정윤석 감독의 영상, 촬영장소와 촬영방법, 사용한 전문 촬영기기, 이력, 진술 등에 비추어보면 정윤석 감독의 기록과 촬영을 위한 진입은 폭동자들의 침입과는 명백하게 구분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연히 폭동자와 정윤석 감독을 구분할 수 없다는 항소심 법원의 판단에는 심리미진 또는 판단유탈의 위법이 존재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특히 항소심 법원이 다른 피고인들도 역사적 사실을 촬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이들과 정윤석 감독을 구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을 두고 “이는 저널리스트에게 요구되는 윤리원칙을 준수한 최소한의 기록행위와, 폭동행위의 일원으로서 참여한 여타 피고인들의 개인방송 중계 행위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변은 “이 사건 판결은 정윤석 감독 한 사람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공적 위기상황에서 필요한 저널리즘의 역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표현 및 예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는 부당한 판결”이라며 “저널리즘을 범죄화하고 정의와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선고한 항소심 법원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대법원에서 이 사건 판결의 위법성이 조속히 시정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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