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그로테스크와 핑크의 충돌···'여성 주체성'을 묻다

김경미 기자 2025. 12. 2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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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은 온통 핏빛이다.

구불거리는 내장과 여성 성기, 뒤틀리고 잘린 신체가 내지르는 비명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시선을 비틀어 아예 여성 성기에게 직접 말하게 한다거나 '문담피(문신·담배·피어싱을 한 여자)는 걸러라'는 인터넷 혐오 표현에 대한 대답으로 내장에 문신을 새기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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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 개인展 '고어 데코'
체액·내장 등 과감하게 재구성
女 혐오표현 관련 작품도 공개
모두 신작···내년 2월 15일까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파의 개인전 '고어 데코' 전시 전경.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파의 개인전 '고어 데코' 전시 전경.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서울경제]

그림들은 온통 핏빛이다. 구불거리는 내장과 여성 성기, 뒤틀리고 잘린 신체가 내지르는 비명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런데 이 핏빛 비명이 터져나오는 곳은 묘하게도 부드러운 분홍빛 공간이다. 가로 7m 대형 캔버스를 뒤덮은 육체의 파편, 피로 물든 내장이 뒤엉켜 거대한 십자가를 이루는 도발적인 그림들이 ‘여성성’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핑크와 충돌해 기이한 불협화음을 낸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파(44·본명 장소연)의 개인전 ‘고어 데코(Gore Deco)’는 제목처럼 피투성이 폭력(고어)과 화려한 장식(데코레이션)이라는 정반대의 감각을 오가며 불편함과 매혹 사이 그 어딘가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장파는 자신의 작업을 ‘여성적 그로테스크’로 규정한다. 남성 중심의 시각 언어와 미학 체계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왜곡돼 온 여성의 신체와 체액 등을 여성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주체성을 구성할 것인가를 몸의 감각을 토대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여성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셈이지만 장파의 방식은 특히 도발적이다. 피투성이 내장이 흘러내리는 것은 기본이며 타투를 새기고 피어싱을 뚫은 성기가 시선을 붙잡는다. 장파는 “앞선 세대의 페미니즘 미술이나 이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어떻게 다시 끝까지 가져가며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좀 더 과감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장파의 개인전 '고어 데코' 전시 전경.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장파, ‘Gore Deco?Stupidity(2025)’.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장파, ‘Drawing for Gore Deco #1(2025)’.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장파의 세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축은 ‘장식성’이다. ‘고어 데코’라는 연작의 이름처럼 형형색색 화려한 색 위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도상이 자리하고 인체 해부도를 연상하는 그림 주위로 금속 장식품이 반짝인다. 작가는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색이나 장식, 꾸밈 등은 표피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장식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마치 감각에도 위계가 있는 듯 여겨지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K2 2층 전시장은 파스텔 색감을 듬뿍 쓴 ‘예쁜’ 그로테스크를 여럿 만날 수 있는데 기묘한 위화감이 매혹적이다. 장파는 “사람들은 파스텔 톤을 소녀적이고 여성적이며 유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의도적으로 더 많이 써봤다. 소위 말하는 ‘예쁘다’는 감각이 왜 유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비판적인 주제 의식에 잘리고 훼손된 신체 이미지가 결합된 그의 작품은 자칫 비장한 느낌을 받기 쉽지만 세심히 뜯어보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유머도 발견된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시선을 비틀어 아예 여성 성기에게 직접 말하게 한다거나 ‘문담피(문신·담배·피어싱을 한 여자)는 걸러라’는 인터넷 혐오 표현에 대한 대답으로 내장에 문신을 새기는 식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 대표 상업 화랑인 국제갤러리와 함께 한 본격적인 첫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서울대에서 서양화와 미학을 전공한 작가는 주요 미술관 그룹전과 아트페어 등으로 대중을 만났지만 상업 화랑 전시는 드물었다. 갤러리 K1과 K2의 총 4개 공간을 꽉 채운 45점은 모두 올해 완성된 신작이다. 대형 유화부터 드로잉, 동판화, 실크스크린 벽화까지 장파가 어떤 작품 세계를 만들어왔고 앞으로 만들어갈지에 대한 단서가 총망라된 흥미로운 전시다. 내년 2월 15일까지.

장파 작가가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김경미 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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