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특별법'의 정체
[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5년 11월4일 태풍 갈매기가 필리핀을 덮쳐 최소 224명의 사망자를 냈다. 피해가 주로 세부에서 발생했는데, 그동안 이 지역에만 394개의 홍수 방지 사업에 253억8000만 페소가 배정됐다. 그러나 방지 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
11월16일 수십만 명이 마닐라에서 시위를 벌였다. 홍수 방지 공공사업과 관련된 부패 스캔들이 폭로된 탓이다. 기업의 약탈과 정부의 방치로 홍수 재난이 비롯됐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조사 결과, 홍수 방지 사업의 상당수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기준에 못 미치는 유령 프로젝트였다. 정부 관료, 국회의원, 건설기업 들이 부패 커넥션을 형성하고 홍수 예산을 축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0년간 홍수 완화를 위해 전국에 1조4700억 페소의 예산이 쏟아졌지만, 계약 대부분을 소수의 부패 기업들이 독점한 채 혈세를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9월부터 12월에 까지 시위가 계속되는 이유다. 올해에만 필리핀에 무려 21번의 태풍이 들이닥쳤고 그때마다 시민들 분노가 파도쳤다.
전형적인 '재난 자본주의'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이 개념화한 재난 자본주의란 재난과 전쟁, 또는 공황 발생시 부자와 지배층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기제를 의미한다. 시민들이 재난의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기업들은 난개발과 민영화를 밀어붙여 돈을 벌고, 권위주의 정치 세력은 권력을 집중시키며, 부패 권력층은 공적 기금으로 잔치를 벌인다.
가령, 2004년 인도양 쓰나미가 3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을 때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금지됐지만, 개발업자들은 제한구역에 건축 허가를 받고 고급 호텔들을 지으며 돈을 벌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초토화시켰을 때는 기업들이 상업 시설을 짓느라 흑인 빈민 지역을 닥치는 대로 철거했다. 한편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에 전력망의 100%가 파괴됐던 푸에르토리코는 각종 민영화와 세금 혜택이 난립하며 부유한 투자자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오늘날 기후 재난은 재난 자본주의를 위한 만찬 식탁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미국 플로리다와 호주 해안 지역은 물론 나이지리아 라고스 해안에 이르기까지 해수면 상승을 핑계로 부자들의 친환경 도시가 들어서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물난리만 그런가? 불난리도 마찬가지다. 2023년 100년 만의 산불로 하와이에서 115명이 사망하고 옛 왕국의 수도가 잿더미로 변했을 때, 부동산 투기꾼과 개발업자들이 독수리처럼 재난 지역을 맴돌았다. 시신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황인데도 생존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땅을 팔으라고 재촉했다. 헐값에 토지를 매수하기 위해서였다.
대형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부동산 투자자와 개발업자들이 재난 지역에 몰려들어 부동산을 싼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파는 '재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는 중이다. 아예 산불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재난 투기꾼들도 극성을 부린다. 2017년 캘리포니아에 대형 산불이 났을 때도 부동산 매매가 17% 급증했고, 2025년 1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산불이 일어났던 LA 지역에도 가격 폭리와 임대료 급등으로 저소득 계층에게 고통이 전가됐다.
그런가 하면 2023년 역대 최악의 산불에 시달렸던 캐나다에서는 임업 회사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벌목 증가를 주장하고 나섰다. 산불 연료부하를 줄이자는 것인데, 막상 산림 생태학자들은 솎아내기와 대량 벌목이 숲의 건조도를 올리고 바람을 강하게 하며 습도를 낮춰 되려 산불을 부추긴다고 입을 모았다. 불탄 숲의 재야생화와 내화성 강한 활엽수 장려가 현명한 산불 예방 대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캐나다 정부 관계자들과 임업 회사들은 산불 핑계로 그저 목재 판매 수익을 노린 것뿐이다.
그런데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산불특별법' 때문에 경북 지역이 들썩이고 있다. 올 3월 역사상 가장 큰 산불 피해를 입은 경북 지역을 복구한다며 1조8310억 원을 들여 골프장, 리조트, 각종 휴양지 등을 개발한다고 한다. 산불특별법에 산불 재발 방지 대책은 온데간데없고, 난개발을 부추기는 독소 조항이 핵심을 차지하는 탓이다.

여당이든, 산림청이든, 지자체든 도통 산불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잿밥에만 코를 박은 형국이다. 기후위기 시대, 매년 연쇄적으로 증가하는 가공할 산불의 아수라장 속에 우리 혈세를 쏟아붓고 골프장과 관광 레저 시설 따위나 지어대자는 저 괴상한 산불특별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재난 자본주의다. 세상이 망해도 돈을 벌겠다는 지독한 개발주의. 기후위기를 야기한 자본주의가 불의 폐허 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또다시 한바탕 춤을 추는 저 탐욕의 불길이 산불보다 더 큰 재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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