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가 독선이 될 때, 노동자는 어디로[이주영의 연뮤덕질기](63)

주위에 ‘탈팡’이 대세다. 거대한 물류 시스템이라는 철골 구조물 아래에서 소모되는 노동자들의 비명에 대한 자각이다. 2026년으로 넘어가는 서울의 뮤지컬 무대도 비슷한 감각을 공유한다. 뮤지컬 <에비타>, <프라테르니테>, <매드 해터: 미친 모자장수 이야기>(이하 매드 해터)는 화려한 장식 대신 텅 빈 공간에 차가운 철근과 비계, 파이프, 벽체를 내세운다. ‘본질만 남긴 무대’는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이 작품들이 묻는 것은 하나다. 연대가 독선으로 인식되는 순간 노동자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환호가 장식품인 정치
1978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에비타>는 20세기 중반 실존 인물, 아르헨티나 영부인 에바 페론의 삶을 다루지만 업적을 나열하는 전기극은 아니다. 작품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질문은 대중의 환호가 권력으로 치환되는 과정이다. 14년 만에 한국 무대에 오른 <에비타>(팀 라이스 작, 앤드루 로이드 웨버 작곡, 홍승희 연출, 서병구 안무, 김문정 음악, 서숙진 무대, 구윤영 조명)는 이를 노동의 본질을 담은 무대미학으로 재해석했다. 앙상블의 고음 합창과 격렬한 컨템포러리 댄스가 동시에 밀려오는 오프닝의 장례식 장면은 정동의 조직화다.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환호는 자연 발생이 아니라 훈련되고 편집된 감정임을 강조한다.
에바(김소현·김소향·유리아 분)는 ‘인물’이라기보다 대중이 발명한 정치적 이미지이며, 체(마이클 리·한지상·민우혁·김성식 분)는 그 이미지를 정면으로 폭로하는 소격 장치로 기능한다. 체는 관객이 에바와 후안 페론(손준호·윤형렬·김바울 분)의 관계를 멜로로 인식할 때마다 질문을 끼워 넣는다. 에바가 군중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반복해서 ‘나’를 ‘우리’로 치환한다. 대표 넘버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는 아르헨티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나도 당신들과 같은 (가난의) 자리에서 왔다”고 노래하며, 개인의 경험을 집단 기억으로 치환한다. 포퓰리즘의 오래된 공식이다. 개인의 몸이 집단의 상처를 대표하는 순간, 비판은 배신으로 치환되고 신뢰는 숭배로 둔갑한다. 체는 여기에도 등장해 찬물을 끼얹는다.
<에비타>는 낯설게 하는 소격 효과를 앙상블의 신체로 ‘재현’한다. 군인·노동자·상류층·군중으로 쉼 없이 변주되는 앙상블은 사회의 작동 방식이며, 환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철근과 비계를 상징하는 무대 미학은 화려한 말의 윤택함 뒤에 존재하는 노동의 피로, 계급의 관성, 군중의 휘발성 등을 함의한다. 이번 한국 프로덕션의 진정한 주인공이 에바도, 페론도, 체도 아닌 앙상블로 와닿는 이유다. ‘머니, 머니(Money, Money)’의 커튼콜 떼창에서 앙상블은 체와 함께 “돈이 굴러간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 위해 퍼준다”라며 “기록하지 말고 그냥 주고받으라”고 언질한다. 포퓰리즘을 극대화하는 윤리의 빈틈을 정확히 찌른다.

연대라는 이름의 독선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프라테르니테>(이다민 작, 임예진 작곡, 이준우 연출, 김진 안무, 남경식 무대, 노명준 조명, 권지휘 음향, 홍문기 의상)는 혁명의 승패에 관심이 없다. 작품은 오히려 더 위험한 질문, 즉 연대는 언제 독선으로 변하는지 반복해서 묻는다. 200석 전후 소극장의 남성 2인극, 진솔한 이중창은 연대의 판타지로 시작한다. 삼면이 그레이 톤 벽체인 무대는 미니멀하지만, 글씨와 그림으로 채워지고 관계의 역사로 변하는 순간 맥시멀한 연대의 흔적이 된다. 빅토르(박유덕·안재영·양지원 분)는 서민과 코뮌을 위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에비타>의 정치적 수사가 떠오른다. 빅토르 역시 반복해서 ‘우리’를 말하지만 늘 누군가의 배제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품은 이 과정을 고발하지 않고 관객이 직접 ‘보게’ 한다. 선의는 방향을 잃고, 연대는 명분이 된다.
제르베(윤재호·김기택·이세헌 분)가 관객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장면에서 이 작품은 한 번 더 선을 긋는다. 조명이 객석을 밝히는 순간 관객은 안전한 외부자가 아니라 잠시나마 제르베의 동료(무산계급)로 호출된다. 빅토르는 그것을 ‘보상’이라 주장하지만 제르베에게 빵은 관계의 제안이며 같은 결핍을 공유해보자는 요청이다. 관객이 박수와 폭소로 화답하는 것은 잠시 허락된 해방이 극의 맥락에 중요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프라테르니테>의 정치적 핵심은 이중창의 미세한 어긋남에 있다. 두 인물은 같은 음을 부르려 하지만 끝내 합쳐지지 않는다. 예상과 어긋나는 이해관계 속에서 빅토르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책임의 이탈로 읽힌다. 그는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연대의 실패를 미래로 유예한다. 반면 제르베는 오열하면서도 감당하기 위해 남는다. 정치적 선택지는 달라도 그들은 사제지간처럼, 형제처럼 연대(‘프라테르니테’는 연대라는 의미다)해왔다. 벽에 남겨진 글자와 제르베가 그린 빅토르의 자화상은 연대이자 해체의 흔적이다. 이를 유지하는 태도에서 <프라테르니테>는 포퓰리즘과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이 작품은 “우리가 옳았다”고 말하지 않고 묻는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났는가.

<매드 해터>(강남 작, 리카C 작곡, 오루피나 연출, 채현원 안무, 이은경 무대, 원유섭 조명, 조문수 의상·모자디자인)는 자본의 시스템화와 무산계급에 대한 소모적 헌신을 요구하는 서사임에도 오히려 상반된 존재의 진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 중반 제2 산업혁명이 배경인 이 작품에서 노아(이한솔·이봉준·홍기범 분)는 굴뚝 청소부였다. 가장 위험하고 가시화되지 않는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온 노아는 최저점에서 모자와 만난다. 그가 말하는 모자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모자는 왜 모두 같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혁명적이라기보다 인본주의적이다. 동일함과 대량생산을 강요하는 시대에 맞서, 자아를 복원하려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노아가 조슬린(박영수·조성윤·송유택 분)과 티타임에서 의기투합하는 지점은 이 작품의 동시대성을 강화한다. 조슬린은 거대 모자공장 대표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독점과 동일화의 논리를 계승하지 않는다. 그는 혁명가도 배신자도 아닌,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증거로 존재한다. 여기서 조슬린의 위치는 <에비타>의 체를 연상케 한다. 체제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그 질서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고 무산계급인 노아와 나란히 걷는다. 지도자도 군중도 필요 없는, 서로의 선택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연대다.
<매드 해터>에서 모자는 빵이나 돈처럼 분배되지 않는다. 각자의 사연을 담아 제작되고 남겨진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포퓰리즘의 문법과 선명하게 결별한다. 에바가 재단을 통해 복지를 연출하고, 빅토르가 코뮌으로 연대를 주장했다면, 노아는 아무것도 ‘대신’하지 않고 그의 모자들 역시 투자 가치가 아니다. 노아의 모자는 존재의 증명이며 동시에 “이 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묻는 본질적 질문이다.
에바는 환호로 대중을 대표했고, 빅토르는 연대로 공동체를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두 시도는 독선과 파국의 문턱에 닿는다. 노아는 대표하지 않고, 조직하지 않으며, 선동하지 않는 대신 노동의 기억과 자유의지를 보존한다. 굴뚝 청소부에서 모자 장인이 되는 여정은 계급 상승의 신화가 아니라 존엄의 회복이다. 세 작품이 공통적으로 철골과 비계, 공허한 여백을 무대 전면에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대가 독선으로 오해받고, 시스템이 신화가 되는 시대에 이 작품들은 ‘탈팡’의 이유를 공연장의 언어로 되돌려준다. <에비타>는 1월 11일까지, <프라테르니테>와 <매드 해터>는 1월 1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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