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요즘 어른의 관계맺기](42)

자주 꾸는 꿈이 있다. 지하철에서 아주머니 가방을 뒤지는 소매치기범과 눈이 마주친다. 내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내며 씩 웃는다. 마치 ‘너는 소리치지 못할 줄 안다’라는 듯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도둑을 쫓을 때도 마찬가지다. 발이 내 맘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도둑이야”라고 고함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꿈을 꿀 때마다 현실처럼 느껴진다. 예닐곱 살 시절 숨바꼭질할 때, 벽장 안에 숨으면 형이 내게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때마다 나는 숨을 죽였다.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이 “조용!” 하면 말을 멈췄다. 그렇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침묵에 길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나는 이런 때 침묵했다.
할 말이 없을 때 입을 닫았다. 내가 할 말이 없는 사람이란 걸 들키기 싫었다. 입이 무거운, 말수가 적은 사람에 머물고 싶었다. 그저 과묵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건 주효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할 말이 없으면 억지로 말하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라고. 왜 총대를 메려고 하느냐고.
나는 잔소리를 자제한다. 충고하고 싶을 때, 조언이 당길 때 침묵한다. 그렇게만 해도 제법 어른 같아 보인다. 남의 얘기를 들어줘야 할 때도 말을 삼간다. 과묵한 사람이 돼서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는 고마워한다. 침묵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왜 김대중 대통령이 집안 이곳저곳에 ‘침묵’이라고 써놓으셨는지 알 법하다. 자랑하고 싶을 때, 잘난 체하고 싶을 때도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는 심정으로 절제하려고 한다. 또한 거짓말을 해야 할 때, 남 탓을 하거나 핑계를 대야 할 때,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을 때 묵비권을 행사한다. 나는 이렇게 침묵을 내면화해왔다. 침묵은 나의 보호색이다.
침묵의 가치
가장 시끄러운 사람은 대개 가장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을 때, 혹은 마음속의 깊은 불안을 잠재우고 싶을 때 사람의 목소리는 커지고 문장은 길어지게 마련이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직장에서는 유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사적인 모임에서조차 정적을 견디지 못해 무의미한 말을 쏟아낸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침묵은 무능이나 약함, 혹은 대화의 단절이라는 부정적인 신호로 오해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소란한 시대에 우리를 살리고 관계를 지켜주는 진짜 힘은 ‘침묵’에서 나온다. 배경음이 없으면 선율이 제대로 들리지 않듯, 평소의 깊은 침묵이 뒷받침되지 않은 외침은 공허한 소음으로 흩어지기 쉽다. 우리가 평소 ‘말해야 할 때’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흠집은 부족한 말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과잉된 말에서 비롯된다. 인생의 궤적을 돌아보며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후회가 ‘그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바꾼 고수들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의 결정적 순간에 의도적으로 입을 닫아 청중의 시선을 화면에 박아 넣었고, 워런 버핏은 말수를 극도로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한마디에 거대한 자본의 무게를 실었다. 그들에게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깊은 사고의 증거이자 상대를 압도하는 ‘사유의 공간’이었다.
침묵은 우리를 깊게 만든다. 우리는 온종일 타인의 목소리와 세상의 소음에 포위돼 살고 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들, 사무실의 기계적인 대화 속에서 정작 나의 목소리는 실종된 지 오래다. 마음이 바쁘고 입이 분주한 사람은 결코 삶의 핵심에 가닿을 수 없다. 말을 멈추고 고요 속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내면의 앙금을 가라앉히는 여과 과정이다.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맑은 물이 위로 떠오르듯, 잠깐의 의도적인 침묵은 우리 마음속의 가짜 욕망과 진실한 소망을 분리해준다. 내가 지금 쫓고 있는 성공이 진정 내가 원하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심어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은 오직 적막 속에서만 길러진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나 자신과 나누는 가장 밀도 높은 대화이며,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숭고한 수행이다.

침묵은 신뢰를 구축한다. 언어에도 경제학의 원리가 적용된다. 공급이 과잉되면 가치는 하락하게 마련이다. 모든 사안에 참견하고 모든 회의에서 첫 번째로 입을 여는 사람의 말은 시간이 갈수록 가벼워진다. 반면 충분히 경청하고 상황을 관조한 뒤 내놓는 절제된 한마디는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 때 비로소 긴장하며 귀를 기울인다. 그의 침묵은 곧 ‘신중함의 보증수표’가 되기 때문이다.
침묵은 성찰을 불러와 상대가 변화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설득은 논리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만, 침묵은 상대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잘못을 보면 즉각적인 훈계와 조언을 쏟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방적인 잔소리는 상대의 방어기제를 자극할 뿐이다. 아이가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 혹은 후배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비난의 말 대신 ‘무거운 침묵’을 선택해보라. 그 고요함 속에서 상대는 자신의 행위를 반추하기 시작한다. 이때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나는 너의 성찰을 믿고 기다린다’라는 가장 강력한 압박이자 신뢰의 메시지다.
침묵의 기술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대화 중 상대의 말이 끝났을 때 의도적으로 ‘1초 포즈(Pause·멈춤)’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짧은 멈춤은 내 말에 신중함을 더하고 상대에게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질문을 던진 후 최소 5초를 기다려주는 행위는 타인에게 사유의 시간을 선물하는 훌륭한 실천이다.
침묵은 단절이 아니다
주의할 점은 침묵과 단절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입은 닫았으되 머릿속으로 반박할 말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절’이지 침묵이 아니다. 진정한 침묵은 내 안의 판단을 멈추고 상대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의도적인 비워둠’을 전제로 한다. 비워진 공간에 비로소 타인의 진심이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침묵의 깊이는 곧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결정한다. 입을 닫는 기술보다 마음을 비우는 태도가 침묵의 완성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워진 공간에 타인의 진심이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경청’이라는 가장 고귀한 인간적 연대에 가닿을 수 있다.
물론 침묵이 항상 선(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이 지혜로운 절제가 아니라 비겁한 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독이 된다. 부당함 앞에서의 침묵은 암묵적 공모다. 구조적인 악행이나 눈앞의 불의를 목격하고도 입을 다무는 것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과 다름없다. 마땅히 터져 나와야 할 분노의 목소리를 ‘침묵의 미덕’이라는 가면 뒤로 숨기고, ‘침묵의 카르텔’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누리는 비겁한 행위다.
진정한 침묵의 가치는 ‘말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분별하는 용기에서 완성된다. 우리가 내면을 닦기 위해 침묵하는 이유는 정말로 목소리를 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순수하고 정의로운 언어를 내뱉기 위함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했다. 가장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르고, 가장 밝은 별은 가장 어두운 밤하늘에서 비로소 그 형체를 드러낸다. 단순히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자. 오늘 당신이 선택한 그 작은 멈춤이 내일의 당신을 더 크게 성장시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당신의 침묵이 내면에서 응축돼 세상에 선한 폭발력으로 전해지는 그날을 기대한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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