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으로 그린 목탄 그림, 스스로 지워버리는 허윤희
‘허윤희: 가득찬 빔’
대구미술관서 2월 22일까지
폐막일에는 개막 당시 작업한
가로 세로 각 5m, 7m 목탄 드로잉
지워내는 퍼포먼스 선보일 예정
탄생과 소멸은 필연적으로 함께다. 나무를 태운 목탄, 검게 그리기와 하얗게 지우기를 반복하는 허윤희 작가는 공들여 만든 작품을 스스로 없앰으로써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어차피 지울 거 왜 그리나요?” 누군가 허윤희 작가에게 묻는다. 작가는 다시 반문한다. “어차피 죽을 거 우리는 왜 사나요?”
작가에게 그리고 지우는 것은 인생과 같다. 목탄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대나무에 목탄을 칭칭 감아 거대한 화면을 채우고, 전시가 끝나면 유리창을 닦는 도구에 수건을 감싸 지워낸다. 채우려고 할수록 비워지는 삶의 이치를 끌어안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생의 유한함을 떠올리고, 그래서 더 소중한 ‘지금’에 최선을 다해 집중한다.

허윤희 작가는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 ‘허윤희: 가득찬 빔’의 개막 첫날인 지난해 11월 4일, 관객 앞에서 목탄 작업에 나섰다. 대구미술관 2층 2전시실과 3전시실 사이 선큰가든에 놓인 가로 세로 각각 5m, 7m 크기의 벽에 ‘물의 평화’가 탄생했다. 이 벽화는 100여일의 전시 기간을 거쳐 폐막일(2026년 2월 22일)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퍼포먼스를 통해 ‘비워내는 연습’을 하는 셈이다.
”아깝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아깝다고 생각하면 못 지워요.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만든 작품인만큼 계속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죠. 그런데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욕심을 비우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지워요. 지워질 걸 안다고 대충 그리지는 않아요.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단 한 번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잘 살려고 하는 것처럼요. 인생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에, 작업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요.”


맨발로 프랑스 들판 뛰놀던 소녀의 세계
이번 전시에는 드로잉부터 회화, 설치, 영상 등 약 240여 점의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작가가 20대 후반 책 위에 덧그린 그림부터 3년 전 제주도로 터를 옮긴 후 마주한 일출까지 지난 30여 년간의 예술 여정을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3전시실에는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작품들을 모았다. 당시의 경험은 작가 예술 세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는 ‘윤희 그림’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엮은 도서 <Noa Noa: The Tahitian Journal>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완성한 작품. 말도 잘 통하지 않던 타지에서 방황하던 젊은 날의 불안함과 꿈을 쫓는다는 설렘의 공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어 위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당시 작업한 목탄 드로잉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것이라고. 미술관의 동쪽을 향해 있는 ‘관집’은 실제로 관객이 들어가 볼 수 있다. “하루가 인생이라면 아침은 탄생, 밤은 죽음”이라는 작가의 사유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2001년 교수님이 진행하던 예술아카데미에서 작업한 것을 재현했다.

작가는 여름이면 교수님을 따라 프랑스 남서부 갈란(Galin)에서 방학을 보냈다. ‘어린 왕자’, ‘야간 비행’을 쓴 작가 생텍쥐페리의 고향인 갈란에서 보낸 나날은 그야말로 자유 그 자체였다. 맨발로 축구를 하며 뛰놀고, 민들레를 따 샐러드, 페퍼민트 잎으로 내린 차를 즐기며 동화 같은 나날을 이어갔다.
“제가 원래 수족냉증이 있는데 낮에 맨발로 뛰어 놓다가 밤이 되면 발이 뜨끈뜨끈해요. 숙소도 없이 텐트를 치고 잤는데, 온몸으로 자연을 경험하면서 동경하게 됐고, 자연에서 작가로 살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제가 10여 년간 이어 온 나뭇잎 일기 작업도 이때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거에요”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풍란부터 제주도를 대표하는 개가시나무, 빙하, 뿌리, 물, 배추, 나뭇잎, 야생화, 일출 등 다양한 자연이 작품에 등장한다. 작품에 자연을 담기 위해 작가는 서슴없이 산으로 바다로 나선다. 나뭇잎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책으로 엮은 ‘나뭇잎 일기’는 10년간 매일 서울 부암동 자택 뒷산을 산책하며 주워 온 나뭇잎을 그려 완성했다. 사라져 가는 야생화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식물 탐사 동호회에 가입해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전문가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시작했고, 제주도로 이사한 후에는 매일 새벽 러닝하며 바라본 중문 바닷가의 일출을 그렸다.
“사실 제주도로 내려갔을 때는 상실감이 컸어요. 서울에서 20년간 강의를 하면서 지치기도 했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제 밀려나나 하는 마음이 컸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새벽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는데 떠오르는 해를 보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사진을 찍다 매일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그리다 보니 우리는 모두 다 ‘태양의 자식’이란 걸 깨닫게 됐어요. 식물도 태양을 통해 광합성을 하고, 우리는 그걸 먹고 자라니 결국 내가 밝고 아름다운 태양같은 존재인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가고 더 힘을 내게 되더라고요”

목탄이라는 언어로 말하는 인생
작가는 주로 나무를 태운 목탄으로 작업한다. 목탄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재빠르게 그릴 수 있고, 레이어를 쌓아가며 깊이감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크다. 손에 잘 묻어나 지워지기 쉽고 작품의 보관이 어려울뿐더러, 가루가 날려 눈과 호흡기에도 영향을 준다. 이러한 제약에 대부분의 작가가 스케치를 할 때나 목탄을 사용하고 주 작업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허윤희 작가는 단점을 보완해가며 목탄을 고집한다. 정착액을 뿌려가며 작업을 이어가고, 보관을 위해 층층이 쌓을 수 있는 널찍한 케이스를 제작하기도 했다. 대형 작업을 할 때면 꼭 작업용 보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한다.


“목탄은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재료이자 순수한 재료에요. 인위적인 것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무를 불로 태운 것이기에 가장 생태적이기도 하고요. 목탄을 사용하는 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에요. 목탄으로 드로잉을 한 번 하고 나면 지워도 흔적이 남아요. 말끔히 지워지지 않죠. 그 위에 그리고 또 그리면 그게 깊이가 돼요. 삶과 똑같죠. 하얀 도화지 위에 아무 실수 없이 흘러가는 삶보다 목탄의 흔적이 남듯 우리도 실패를 거듭할수록 더 성숙해지면서 저마다의 길을 찾아가니까요”
전시는 2월 22일까지.
대구=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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